적자생존의 이변
전례없는 역병이 이 문명화된 시대에도 사회를 훑고 지나갔다. 사회가 멈춰버린 것 같은 상태이지만 대한민국의 국민성은 평소 북한 미사일로 다져진 담력을 과시하듯 백의민족의 평온함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울리히 벡이 명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삶의 편의와 풍요를 위해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방치함으로써 체계적이고 항시적으로 위험과 공생하는 사회. 특별히 백의민족은 이 위기에도 사재기 하나 없는 의연함으로 외신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위험과 공생해온 민족답게 큰 동요가 없다. 꽤나 일상적인 한국에 문제가 있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잘 실천한 탓에 온다는 '코로나 블루'내지는 우울증이겠다.
우울증에 항체가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내향성과 고양이스러움을 한껏 살려서 너무 잘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제한된 것들이 분명 있긴 하지만, 덕분에 확장성이 없는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개체화된 개인이 얼마나 더 개인화될 수 있는지 관찰하는 사회학 실험같다.
집순이로 대표되는 나와 비슷한 삶의 양식을 지닌 사람들은 행동방식이나 반경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결과적으로 스터디로 인해 학교를 왕복할 교통비와 시간을 벌었고, 망구와 산책을 놓치지 않을 수 있으며, 집 앞 스터디 카페와 교회 정도를 걸어서 혹은 그마저도 자전거를 타며 오간다. 사실 요즘엔 교회도 폐쇄라 얼씬거릴 일도 없다. 근데 그래서 진심으로 좋다.
그렇다면 무슨 재미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집순이는 집에서 굉장히 바쁘다. 집에서 책을 읽거나, 망구옆에 누워 망구의 눈을 바라보거나, 일주일치 뱅쇼를 만들거나, 거실을 침범하는 늘어지는 햇빛을 지켜보거나, 20층에서 단지 내의 공간음을 듣는다던가, 사실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더 많다. 인간관계에 확장가능성은 없지만 나의 삶의 충만함을 위한 확장성은 얼마든지 무한대로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확장성에 쏟을 에너지를 보통 충만함의 깊이에 소모하는 편인 것 같다.
이 역병을 통해 집순이, 내향성인 사람들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다는 실험 결과를 처음으로 얻게 된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기뻤다. 사회 부적응자인줄 알았던 나의 속성이 꽤나 쓸모 있겠는걸?하고 이것이 적자생존을 말하는 사회에 아웃라이어 혹은 반례쯤이 된 것 같아 피식하게 된다.
끝없는 적자생존의 가도를 달리는 나에게, 이 취준의 레이스에서도 나의 고양이스러움이 제발, 조금이나마 쓸모있는 것이 되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