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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Oct 14. 2018

돈으로 사는 짧은 행복

2018년 어느 8월의 일기

또 필요 없는 물건을 샀다.

어느 저녁 서점에서 힐끗 보고, 예쁜 디자인과 타자기 치는 듯한 키감과 타닥타닥 소리에 잠시 마음을 뺏겼던 블루투스 키보드. 하지만 내게는 이미 노트북도, 아이패드와 여기에 찰떡인 아이패드 전용 키보드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이패드와 아이패드용 키보드도 꽤 오랜 시간 내게 행복한 기다림의 시간을 선사한 아이들이었다.


무엇인가 사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것을 사기까지의 즐거움은 물건 자체에 대한 소유욕도 있겠으나, 그 물건을 통해 내가 얻을 부차적인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더 크다. 아이패드는 소위 앱등이, 애플덕후인 내게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나, 그것이 내게 어필하는 매력은 무엇보다 아이패드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아이디어가 뿜뿜할 것 같고, 그 아이디어는 언제든 기록과 보관이 가능하며, 손쉬운 검색과 활용 또한 내 삶을 지금보다 더 낫게 해 주리라는 일종의 맹목적인 기대감이었다. 글쓰기를 취미이자 나아가 특기 삼고 싶은 내게 아이패드는 ‘글을 쓰는 작업’을 더 손쉽게 만들어줄 일종의 최신식 무기 같은 것이었다.


몇 달 간의 기다림 끝에 아이패드를 손에 넣었었다. 나의 기대처럼, 한동안은 열심히 갖고 다녔다. 언제든 꺼내 쓰리라 생각하며. 마치 브런치에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글을 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브런치를 잠시라도 봤다면 알 수 있듯 이 역시 설레발에 그쳤다. 생각해보면, 맥북을 샀을 때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점에서 우연히 본 블루투스 키보드는 또다시 내게 아이패드와 비슷한 종류의 설렘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타자기 같은 소리와 레트로풍의 디자인은 내 글쓰기에 영감을 한껏 안겨줄 것만 같았다. 사실은, 이제 조금은 식어버린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향한 설렘의 기분을 잠시 재현시켜줄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등산을 하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등산 전문가로 꾸며야 하듯,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시작할 때 장비부터 갖추려 든다. 하지만 이미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이런 일련의 사전 준비가 진짜로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정말 무언가 하고 싶은 사람은 일단 그걸 먼저 시작한다. 환경도, 장비도, 무엇도 갖춰지지 않았던들, 하고 싶은데 어쩌랴? 그냥 해야지. 그렇게 하다 보면, 더 잘하기 위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생기고 부득이 그걸 사게 된다. 그게 훨씬 자연스럽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수많은 음악가들과 미술가들이 그렇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꿈을 위해 밑바닥서부터 시작하는 많은 청춘들이 그렇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한다. 무언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아니 어쩌면 무언가 하는 자신의 모습이 은근 멋지다고 생각하고, 그 모습을 위해 필요한 장비나 환경을 먼저 갖추려 한다. 이를 갖췄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온전히 초반에만. 이미 본인이 생각한 그럴싸한 모습을 다 뽑아낸 다음에는 이미 결판이 나고 만다. 대부분은 안 하는 쪽으로.


꼭 필요하지도 않은 블루투스 키보드를 기어코 사고 난 후에, 무려 2개월이 지난 후에야 지금 이 글을 이어서 쓰고 있는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너는 정말 글을 쓰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글을 잘 쓰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것인지. 정말로 글쓰기를 좋아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감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과연 ‘아이패드가 있다면’, ‘예쁜 키보드가 있다면’, ‘좀 더 편리한 환경이 갖춰진다면’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인지. 글에 대한 절박함이 크다면 방 안에 넘치는 노트와 펜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는지.


어떤 물건들은 ‘짧은’ 행복을 담보로 불필요한 소비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이런 종류의 소비는 결국 진짜 그것을 하고 싶고,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선망하는 그 무언가를 채워줄 것만 같은 심리적인 보상의 발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건을 통해 심리적 보상을 얻고 난 후에는 소비 전까지 나를 설레게 했던 행복감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또 다음 소비의 대상을 찾게 된다.  


돈으로 사는 짧은 행복은 마치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그만큼 그리 건강하지는 못하다. 이런 종류의 소비로 얻는 만족감과 행복감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 때, 그 욕구의 민낯을 먼저 볼 필요가 있다. 그간 수없이 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보며 앞으로 더욱 '소비'라는 행위에도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늦은 일기지만, 글로 기록해 둔다.


그리고 글에 대한 절박함이, 비록 소비로 인한 짧은 행복보다는 크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뤄둔 일기를 늦게라도 이어나가듯 글쓰기는 지속해보려 한다. 어떤 취미는 취미로 삼고 싶어서 삼아지는 것도 있을 테니 습관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맥북이든, 아이패드든, 블루투스 키보드든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펜으로라도 글을 써나가고 싶을 정도로, 물건보다는 본질에 충실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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