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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Nov 04. 2018

여행의 의미

“여행 좋아해요?”

누군가 물으면 언제나 “좋아한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했고, 학생일 땐 캐리어 끌고 공항 가는 것이 로망 중 하나였으며, 유창하진 못해도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해외로 가는 여행 말이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운이 좋게도 1년에 최소 한 번 이상은 출장으로 다른 나라를 갈 일이 있었고, 출장이 아니더라도 연 1회 이상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내 나름의 목표였으며, 이를 실행에 옮겼다. 덕분에 아주 많이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흔히 다른 사람들 가본 나라들은 대략 한번씩 가본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여행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보면서는 어딘가 유럽의 건물과 거리의 모습들이 살짝 지겹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이제 해외여행이 내게 주는 가치 중 ‘새로움’ 같은 것들은 비중이 좀 적어진듯 느껴지기도 했다. (아, 가우디 건물은 철저히 논외다. 일생에 꼭 한 번 보길 추천한다.)


‘그렇다면, 여행이 내게 주는 진짜 의미는 뭐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고, 왜 여행을 하려고 하는걸까?’


해외여행이 흔하디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요즘, 때만 되면 인천공항에 숱하게 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은 여행을 왜 가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도 다들 가서, 나도 어디에 갔다왔다고 자랑하듯 말하고 싶어서, 반복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서 등등 각자의 이유가 있을테지만, 적지 않은 돈과 금쪽 같은 휴가를 기꺼이 여행에 쓰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든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는 여행이 주는 의미, ‘내가 여행을 해야하는 진짜 이유’를 찾는 것이 문득 중요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하는 이유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소위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경험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  주체가 되는 사람이 그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을 하든 그로부터 얻는   사람이 담을  있는 그릇의 크기만큼만 담기게 되어 있다. , 내가 그만큼의 그릇이 되지 않는다면 여행에서 얻는 것은 보통의 기대만큼 크지 않다. 여행뿐 아니라  무엇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그리 성숙하지 못한 나는, 그래서 최근의 여행에서 ‘여행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은 누군가의 일상이 나의 비일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는 누구나 그렇듯,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해외로 나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내가 ‘이현진’이 아닌 ‘이방인’이 되는 곳이니까. 현재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타인의 시선과 얽혀있는 관계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일상에서 탈출하려면, 나를 둘러싼 온갖 제약과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해외여행은, 나를 내가 속한 환경에서 물리적으로 떼어놓을 수 있게 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나의 일상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 가는 곳은 결국 어디인가?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 속이다. 여행을 떠나는 곳은 결국 나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이 펼쳐지고 있는 곳이며,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즉, 여행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일상이 나의 비일상을 만들어 내는 경험이고, 이것이 내가 여행에서 만나는 첫 번째 의미다. 나의 비일상이 다른 이들의 일상에서 비롯됨을 아는 것은, 곧 내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어딘가에서 보게 되는 외국인들의 삶은 어딘가 나와는 달라보이고 때로는 더 재미있고 멋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의 삶은 마치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처럼 한 순간 한 순간 그저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의 눈에도 내 삶이 그렇게 비치지 않을까? 나는 그저 반복되는 일상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은 한국이라는 이국적인 여행지의 배경으로 남게될 것이다.


내가 여행지에서 느끼는 타인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낭만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여행 온 타인들이 느끼는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내 삶은 그 자체로 여행이 된다. 내 삶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이자 머물고 싶은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한 조각 퍼즐을 맡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어떤 여행자에게는 비일상의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다는 것, 그걸 느끼는 건 큰 위로이자 격려가 된다. 나아가 내 삶을 더 즐기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책임감까지 안겨준다.


여행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인 동시에, 변치 않는 진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의미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을 가게 되면 익숙한 곳이 아닌 낯선 곳, 낯선 상황 속에 놓여진 나를 보게 된다. 지하철은 어떻게 타는지, 주문과 계산은 어떻게 하는지 등 아주 사소한 것들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짓는 표정, 하는 행동을 한 발 물러서서 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해외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때로 나도 모르는 용기와 내가 몰랐던 대범함을 마주하기도 하지 않나.


동시에 이런 경험은 '변치 않는 진짜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고 어디선가 다시 마주치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가능성도 불가능에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진짜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는 시간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어쩌면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은 아닐까. 내게도 해외여행은 잘하면 '삐뚤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오리라는 계획과 포부는 그간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었다. 나는 여행지에서도 늘 내가 가던 곳에서 하던 것만 하다 일상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렇다고 한식을 찾아다니고 스타벅스를 간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진짜 '일탈'이라고 느낄만한, 한국에서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하지 않을 법한 무언가에 도전해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최근의 여행도 그랬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있었음에도,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내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누군가 말을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들 뿐인데도 여전히 주변을 의식했으며, 사람들 북적이는 클럽이나 바는 문턱도 넘어보지 않았다. 결국 관성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게 나라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여행의 의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진짜 나는 아니니까.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관계 없이 변치 않는 것이 본질이라면, 여행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낯선 곳에서 내가 몰랐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 그럼에도 변치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닮아있다. 둘 다 결국은 진짜 내 모습을 보는 일이니까. 여행이 꼭 새롭거나 도전적이거나 모험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내 모습을 보게 되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니 기쁜 일이고, ‘그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지 뭐’ 하게 되더라도 자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이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느 쪽이든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조금 더 나를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여행이다.




그간 해외여행은 내게 일종의 ‘도장깨기’는 아니었나 싶다. 어렸을 때의 환상이자 로망이었던 대상이 손에 잡히기 시작하자 전에 가봤던 국가는 자연스럽게 여행지에서 탈락하게 되고, 가본 국가나 도시를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 여행의 재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여행의 ‘재미’라기 보다는 ‘허세’에 가깝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건 ‘어디’를 가보았느냐가 아니라, 가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느냐 이다. 열 번을 가더라도 다른 걸 느끼고 배울 수 있다면 그곳은 여행지로 여전히, 충분히 가치 있다. 다만,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려면 그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익숙한 것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 스스로의 참모습을 용기있게 드러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 여행지에서 펼쳐지는,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 맞게될 사소한 일상의 순간 순간에도 감사하는 마음 같은, 그런 것들.  


다음 여행이 기대된다. 어디를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어디를 갈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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