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아마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진 건, 내가 요즘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어서일 거다.
그러고보니 요즘 들어 생각을 위한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도 했던 것 같다.
원래 나는, 출퇴근길 운전하며 잡생각에 빠지길 좋아하고,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떠오른 생각의 꼬리를 잡아 다른 생각을 더하기를 좋아하고, 카페에 홀로 앉아 사유를 즐기는 것 또한 취미이자 특기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부쩍,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종종 스친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 또한 유효한 생각일지는 모르겠다.
지나가다 본 무엇이든, 갑자기 떠오른 무엇이든, 사유의 소재로 작용하지 않는다는건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만큼 내 삶이 어떤 자극이 없이 평탄하다는 것이거나, 내게 어떤 자극도 가해지지 않을만큼 내 영혼이 무뎌졌다는 것이니까.
먼저, 내 삶이 그렇게나 평탄한지에 대해 자문을 해본다.
찬찬히 살펴보니 꼭 그렇지는 않다.
난 늘 그래왔듯, 여전히 나의 욕심과 자존심 탓에 혼자 상처 받고 회복하길 반복하고 있다.
일 때문이다. 아니, 여전히 내 삶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 속에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정답도 없고,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아직도, 여전히 나는 그렇게 나한테 욕심이 많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조직 안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일을 계속하는 한 풀리지 않을 숙제다.
아직 일하는 모습의 나와 갈등이 있는걸 보니, 내 삶이 아무 자극 없이 평탄하기만한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무뎌진건가?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지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조금은 덜 감정적으로 변하면서 일희일비를 하지 않는 것일테다.
물론 때로는 어렸을적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표현이 그립기는 하지만.
어쨌든 감정 사이의 폭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지 않는다는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되기도 하니까.
확실히 나도 그렇게 변했고, 변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상치 못한 순간의 눈물은 더 많아졌지만, 전반적으로 덜 놀라고, 덜 기뻐하고, 덜 슬퍼하는 것 같다.
‘아는 맛’이 많아져서겠지만, 섣불리 ‘아는 맛’일 거라고 치부해버리는 오만도 나이와 함께 자랐겠지.
요즘 내 생각이 많지 않은 것도, 사유의 깊이가 깊지 못한 것도, 영혼의 건조함 때문인 게 맞는 것 같다.
새로움을 찾지 못하고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이 건조함은 아마도 익숙한 매일, 제한된 경험, 그리고 나이와 함께 자라버린 오만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더 열려 있는 자세, 더 많은 경험을 해보려는 시도,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마주하려는 노력에 잠시 소홀했다.
세상이 보내는 자극과 신호는 그걸 받아들이는 주체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나마 고무적인건, 생각다운 생각이 적어진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 자체를 글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려나.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무턱대고 글을 써내려가다보면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글쓰기는 생각의 씨앗에 물을 주는 행위나 다름 없으니까.
늘 다짐뿐이지만, 역시나 글을 더 자주 써야겠다.
깨어있어야할 많은 것들에 더 무뎌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