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의 잔상
친구와 강남에서 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차를 두고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 어느 날이었다. 약속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지하철역을 내려가다 보니 흰머리에 등이 굽은 한 할머니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껌을 팔고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옆에 있는 친구에게 현금을 빌렸다. 껌이 얼마인지, 무슨 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껌이 필요한 게 아니었기에 부랴부랴 5천 원을 드리고 아무 껌이나 하나 집어 오려는데, ‘어이쿠 무려 5천 원이나!’하는 표정으로 풍선껌 2개와 자일리톨 1개를 손에 쥐어주신다. 아주 잠시 동안 “하나면 된다”는 나와 ”3개를 다 갖고 가라”는 할머니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나는 3개를 다 받아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는 마음이 아주 따뜻하거나 측은지심이 유달리 풍부한 사람은 아니다. 매달 어린이를 위한 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북극곰의 딱한 사정에 지구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 정기후원을 하고 있는 정도다. 누구나 동정심을 가질법한 사연에 함께 눈물 흘리지만, 그렇다고 자원봉사를 하거나 특별히 나서서 무언가를 더 하고 있지는 않은, 그저 남들과 비슷한 공감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유독, 내가 그냥 지나치기 힘든 풍경이 하나 있다. 길거리에 앉아 무언가를 파는 할머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길거리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을 보면 그 순간 갖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나를, 내 마음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할머니가 이 거리에 나오기까지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이미 70-80년은 족히 살아오신 당신의 삶은 오랜 시간 충분히 고달팠을 텐데, 죽음과 가까워진 나이에도 어쩌면 이리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신 걸까. 흰 눈이 소복이 쌓인 할머니의 머리, 제때 제대로 된 틀니를 하지 못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입, 그 입 주변을 비롯해 얼굴 전체에 촘촘히 자리 잡은 주름, 한평생 무엇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해 굽어버린 것만 같은 등. 이 모든 이미지들과 바로 그 이미지를 만든 할머니의 오래도록 지난했을 인생이 내게는 너무 애달프게 다가온다.
할머니가 팔고 있는 껌, 나물, 김밥 같은 것들에는 혹시 어린 손주들의 끼니 같은 게 달려있지 않을까. 설사 당신 혼자의 생계를 위해서일지라도 스스로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누구보다 취약한 계층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풍선껌이라도, 내가 뽑은 나물이라도, 직접 만든 반찬이라도 팔아보기 위해 길바닥으로 나서는 할머니들에게 나는 늘 높은 마진을 기꺼이 남겨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쩌면 이런 감정은, 무의식 속에 자리한 나의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거나, 누군가의 엄마였을 할머니들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찡한 무언가를 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한 인간이 그 수명을 다 써가고 있는 시점에서까지 처절하게 삶과 싸우고 있는 모습 자체에서 오는, 같은 인간으로서의 안타까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전자가 내 개인적인 추억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면, 후자는 인간에 대한 보다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일 듯하다. 할머니의 풍선껌이 내 마음 한편에 이토록 저릿한 무언가를 남겨 놓는 데는 후자의 묵직함이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도 어쩌지 못하는 삶의 무게에 대한 알 수 없는 책임감과 연대의식 같은, 그런 것들.
한평생 각자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내가 감히 무어라 말하거나 그 분들의 생애를 가늠해 보는 것은 가능하지도,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다만, 그 누구든, 주어진 삶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이면 오랜 시간 지어온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삶을 행복했었노라 회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시간 내내 엎치락뒤치락 힘들었던 영화 한 편도, 마지막 10분이 행복하면 해피엔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