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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Mar 15. 2022

기술의 역설

기술은 사람을 가깝게도, 멀게도 만든다.

아빠는 종종 과거의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특전사로 군 복무하던 시절의 스릴 넘치던 이야기, 경찰로 30년 가까이 복무하며 겪었던 이런저런 무용담들,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던 학창 시절 이야기까지. 그러다 '그때 군대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그 사람'이나 '한때 어울려 놀던 그 양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해하신다.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언젠가 우연이라도 한번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는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누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를 수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딱 한 번의 연결로 영원히 연결될 수 있는 시대


휴대폰은 고사하고 개인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통신기기가 없었던 시절, 사람들은 집 전화번호나 주소를 주고받고, 번호가 바뀌거나 이사를 갈 때마다 지인들에게 이를 알려줘야만 했다. 어쩌다 이 절차가 꼬이거나 세상사에 치여 뜸해지기라도 하면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고 그 사람은 추억 속에서만 살게 되곤 했다. 82년생인 나 또한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친구들 중에는 이렇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이 꽤 된다. 지금의 10-20대에게는 신기한 일이겠지만.


하지만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고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그 이후에 알게 된 사람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늘 지근거리에 존재한다. 한 번이라도 연락을 나눴거나 ‘온라인 상의 친구’가 되기로 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내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으로 언제든 그 사람의 일상을 엿볼 수 있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친한 친구나 근황이 궁금한 사람들은 물론,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예전 직장 동료, 업무차 몇 번 미팅했던 사람, 술자리에서 함께 어울렸던 친구의 친구까지. 나와의 친분이나 만남의 빈도 같은 건 상관없다. 그저 내 휴대폰에 연락처가 있거나 한 번이라도 온라인 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친구 맺기’를 했다면 누구라도 언제든 연락이 닿는 거리에 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연락이 끊길까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편리함은 늘고 애틋함은 줄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삶은 더 편리해진다. 두꺼운 전화번호부에 가나다 순으로 적혀있는 연락처를 찾지 않아도 되고, 친구 집에 전화를 걸 때 친구 엄마나 아빠가 받으실까 봐 조마조마해하지 않아도 된다. 방학식이나 졸업식 때 어쩌면 있을지 모를 친한 친구와의 이별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연락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만큼 사람 사이의 애틋함이나 격한 반가움 같은 것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헐거워지고 있는 듯하다. 내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는 언제 어떻게 알게 됐는지 기억조차 안나는 사람들이 항상 떠있고, 어쩌다 알게 된 사람들도 내 SNS 피드에 본인의 소식을 열심히 띄운다. 그러다 보니 사람 사이의 헤어짐이 그리 두렵지 않고,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보나 하는 애틋함도 없다. 언제든 온라인에서 연결되는 세상에서는 연락처를 까먹거나 잃어버릴 일이 없어진 대신, 주고받는 메시지의 무게감과 소중함도 옅어졌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타워를 가지 않는 이유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고, 언젠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의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지만 끈끈하지는 않고,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지만 깊이는 없다. 실제로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사람일지라도 생각만큼 격하게 반갑지는 않고, 그 누군가가 궁금해 미칠 일도 없다. 외로운 마음에 SNS에는 쉽게 글을 올리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일은 드물다.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프로그램은 더 이상 효용이 없어질 것이다.


기술은 사람을 멀게도, 가깝게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 서로 연락하기 힘들었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술의 진보와 그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다 보니 문득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을지 모를 것들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기술로 많은 것들이 변해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 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소중할수록 너무 쉽게 손 닿을 거리에 있으면 그 소중함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너무 식상한 비유이지만, 공기처럼 말이다. (그나마 미세먼지의 공격으로 그간 안중에 없던 공기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가고 있는 중이긴 하다. 늘 잃어봐야 소중함을 안다는 게 슬픈 일이긴 하지만.)


예전에 매일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와 얼굴 보고 대화하고 교감한 지 수년이 지났어도, 난 여전히 그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다. SNS에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친구의 일상은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의 싹을 잘라버리기 충분하다. 기술의 발전은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다가 놀랍고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갔다. 기술은 사람들을 전례 없이 가깝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멀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은 더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연락을 미루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일상 이면에 관심을 갖고, 만남과 헤어짐에는 좀 더 진정성을 담으려는 노력 같은 것. 기술의 편리를 누리면서도 기술이 채 전달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도 기술의 진보 속에서 따뜻함과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 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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