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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진 Apr 01. 2022

의미의 의미

어떤 장면이든 카메라 앵글에 담기면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 같다. 화폭에 담긴 다양한 모습들도 그렇다. 하지만 실제 그 대상이 되는 숱한 인물들과 풍경들을 실제 현실에서 보았더라면, 어쩌면 눈길 한번 주지 않을 평범한 모습들에 지나지 않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무엇이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도 누군가의 앵글이나 화폭에 담기면, 갑자기 의미 있어 보인다. 자연 속에서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일부를 톡 잘라 프레임 안에 옮겨오면 왜 갑자기 매일 보던 건물이, 수없이 보던 거리가, 아무 감흥 없던 장면이 아름다워 보이고 어딘가 그럴듯해 보이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접한 수많은 예술작품들은 피사체가 예뻐서가 아니라, 장면이 멋져서가 아니라, 대상이 의미 있어서가 아니라, ‘작업자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의미가 있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렸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의미가 있어서 찍은 것이 아니라, 촬영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업자의 시선과 의도, 그 순간의 감정이 담긴 모든 대상은 더 이상 그냥 장미가 아니라 '어린 왕자의 장미'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사진이나 그림으로 남겨 놓은 대상을 보면, 막연하게 거기에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본능적으로 이를 찾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설령 아무 생각도 의미도 없는 작업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거나 사람들이 열광하는 작품들은 작업자가 실제로 담은 의미와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해석한 의미가 일치하거나, 반대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어 각자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만드는 작품들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는 사실 아무 의미 없다.


이쯤 되니 ‘의미’라는 게 그야말로 참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내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람, 사물, 상황은 그저 존재하지만, 그들이 지니는 가치나 의미는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가장 다른 점들 중 하나도 바로 이 부분이다.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건네주면 원숭이는 그저 받아 들고 맛있게 먹을 뿐이지만, 누군가 갑자기 내게 바나나를 주면 ‘나한테 이걸 왜 주는거지?’, '나랑 친해지고 싶나?' 등등 잡다한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은 그저 ‘A가 나에게 바나나를 주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인간은 그 행동 이면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나에게 오늘 일어난 일들은 그저 발생했을 뿐이지만, 숱하게 많은 순간순간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나만이 오롯이 기억하는 형태로 머릿속에 저장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알게 모르게 매 순간, 많은 대상과 상황들에 크든 작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결국 우리들 삶은 이 과정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아주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각자의 의미 부여 방식이 각자의 삶을 결정한다.


이런 ‘의미 부여’는 곧 나와 세상 간의 상호작용이다. 세상과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존재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무언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식, 곧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의미 부여를 얼마나 긍정적으로, 창의적으로 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거나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바는 다 다르다. 가령, 단편적으로는 이 모든 상호작용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양 끝에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가 위치하게 된다. 낙관주의자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발전적이고 희망적이다. 반면 비관주의자는 같은 것을 보더라도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하다.


만약 이 의미부여 방식을 스스로가 온전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면 누구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에 얼마만큼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 가치관 등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엔 유전적 요인도 있을 것이고, 후천적인 환경의 요인도 작용한다. 따라서 그저 ‘나는 앞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때부터 그렇게 하게 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갖가지 마음의 병들은 없었을 것이다.


의미 부여를 잘하려면, 매일의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루에 정말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각자의 프레임과 가치관에 따라 의미 부여의 순간들을 맞이한다. 이에 따라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점의 기분이나 감정이 결정되고 이런 하루하루는 결국 삶에 대한 태도와 만족도로 이어진다.


이 무수히 많은 순간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흘러가 버리거나 그간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별다른 의식의 여과작용 없이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말했던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비롯해 나의 성격과 가치관 등에 의해 내가 해온 방식에 따라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면,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근육을 만들려면 매일 일정량의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매일의 순간마다 눈앞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오래된 나를 떠나라(웨인 다이어 저)>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한 발짝을 내딛는 것으로 땅에 길을 내지 못하듯, 한 가지 생각으로는 마음에 길을 내지 못한다. 물리적으로 깊이 팬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길을 만들려면 우리 삶을 지배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고 또 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는 결국 내 마음에 어떤 길을 낼 것인가와 같다. 내 마음에 내고 싶은 모양의 길이 있다면, 매일매일 의식적으로 그 길을 따라 걸어야만 한다. 처음엔 힘들 수 있다. 아직은 덤불이 무성하고 이정표도 명확하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길이 닦이지 않아 방향을 잃고 헤맬 수도 있고, 때로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방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맞는 길을 찾게 되고, 그 길을 서서히 반복해서 걷게 되고, 무수히 많은 시간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나있는 길을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게 바로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는’ 그런 삶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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