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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18. 2020

나는 오늘도 애증의 대상을 응원한다...!

중요한 건 '처음'을 언제 만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남도록 하느냐다.

이제 다시는 안 본다!
내가 진짜 또 보면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즐거웠고 다신 보지 말자!


나는 이 말을 일 년에 최소 4개월 이상, 화요일부터 일요일 저녁 7-9시 사이에 주로 내뱉는다. 특이점이라고 할 만한 사항은 비 오는 날은 나의 분노(!)도 잠시 쉴 수 있는 날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올해는 장마와 집중 호우로 예년보다는 욱하는 게 좀 줄었다. 이해는 안 되겠지만 저런 불같은 다짐을 매일같이 하고도 다음 날이면 나는 또 후회할 일을 반복해왔다.


예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화를 내는 대상은 프로야구다. 프로야구팬으로 산 지난 세월(!)을 한 줄로 요약하면 ‘좋아하는 데 밉고, 미우면서도 궁금하기는 하고, 궁금해서 보면 화를 내게 되고, 화를 내면서도 또 응원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상한 건 이런 감정은 승패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 프로야구 10개 구단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경기를 하고, 그중 5팀은 승리하고, 5팀은 진다. 분명 승리한 팀이 있는데 10개 구단 팬들은 예외 없이 매 경기 진노(!)한다. 이 현상에서 승리한 팀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고, 리그 1위 팀이라고 해도 소용없다, 절대!!! 말하자면 프로야구는 팬들에게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 그 자체인 것이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지만 프로야구는 특히 지면 안 되고 이겨도 무조건 완벽하게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소리 듣기 힘든 게 아니라 욕먹기 십상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완벽하게 이긴다는 게 진짜 힘들다. 야구는 팀 스포츠이면서도 선수 각자의 역량이 포지션 별로 매일 기록으로 남겨지고 평가된다는 점에서는 개인 종목에 더 가깝기도 하다. 거기다 평균 경기 시간이 3시간 30분으로 긴 편이고, 전 경기를 생중계하기 때문에 선수 개개인의 실투, 실책이 없을 수도 없고, 묻히래야 묻힐 수가 없다. 프로야구 역사에 남는 ‘흑역사 짤’로 안 만들어지면 그나마 다행. 이기더라도 팬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한두 번 신들린 듯 한 경기를 하는 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퍼펙트 경기(!)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한다. 바로 다음 날 벌어지는 경기로 금방 잊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기에서 역대급 실수를 했어도 이겼다면 절대로 욕먹지 않는 날이 시즌 중 딱 하루가 있기는 하다. 바로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결정되는 경기. 그러니까 우승 정도(!)는 해야 덮인다. 그러나 우승 프리미어 그마저도 새로운 시즌이 개막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프로야구에서 우승팀에 대한 '전관예우'같은 것은 없다. 오직 새 시즌만 존재할 뿐이다.


친구 따라 야구장을 처음 간 게 오늘날까지 이어진 고통(!)의 시간을 낳았다. 차라리 리그 하위 팀이었으면 기대애초에 접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까.(그럴 리가...) 매 시즌 가을 야구를 하고, 한국 시리즈도 직행한 팀이었기에 우승은 금방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시즌 중에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국 시리즈만 가면 새가슴이 되었다. 결정적인 순간 투수는 실투를 던졌고, 실책성 수비로 실점을 막지도 못했다. 공격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타자는 무기력하게 타석에서 물러났다. 스코어보드의 숫자는 마치 상대 팀 전용 같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가질 수 없었다.


팀 창단 후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내 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우승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우승이란 모순적이게도 하고 싶어도 해 본 경험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목표 같은 것이었다. 수많은 승리를 가졌어도 우승 한번 하고는 상대도 안 됐다. ‘열 번 잘하고 한 번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 내 팀을 두고 한 말인가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데 10년을 꼬박 채우면 우승하는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놓을 수는 없었다.


‘멋모를 때 해야 된다’는 말의 의미를 내 팀의 우승을 기다리면서 깨우쳤다. 우승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점점 더 절박해질수록 조급함만 커졌다. 이기고 있어도 지킬 수 없었고, 지고 있을 때는 추격할 수 없었다. ‘이대로 또...’라는 불길한 예감을 그들은 이겨내지 못했고, 그들뿐 아니라 나도 패배의 순간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우승하리라는 기대를 포기했다.


나와 팀 궁합이 안 맞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 혼자 우승 기대를 접은 그 해에 팀은 창단 첫 우승을 했다. '처음' 우승의 맛을 본 그들은 그 후 여러 차례 우승 팀에 이름을 새겼다. 계속 우승에 실패하던 팀이 맞나 싶을 만큼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다. 그러나 우승이 당연한 일로 여겨질 때쯤 팀 성적은 다시 곤두박질쳤다. 내가 팀 순위를 순위표 맨 아래에서부터 확인하는 건 벌써 몇 년이 더 된 일이다.  



뭐든지 처음은 어렵다. 다음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그 한 번의 경험'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처음’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난이도’가 아니라 ‘진심’이다. 처음이 쉽고 어려움으로만 기억될 때, 그것은 단지 ‘통과의례’ 일뿐이겠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찾을 때 ‘자신만의 의미’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감이든 용기든.


처음이라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란 것만으로도 이미 특별하다. 더 특별해질 필요도 없고 애써 별 것 아닌 것이 될 필요도 없다. 다만 시작이 남들보다 늦다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기를.

당신의 처음은 언젠가 온다. 중요한 건 '처음'을 언제 만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남도록 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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