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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04. 2020

오해는 순간이지만 이해받는 것은 기약 없다.

        1N 년 전, 대구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처음 혼자 살게 된 집은 작은 원룸이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풀옵션 원룸으로 보증금 천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32만 원이었다. 같은 건물 꼭대기 층에 사는 건물주인 할머니와 부동산 중개인은 7평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5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신축이라는 것 외에는 아주 좋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은 인상의 집이었다. 원룸은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보다 예산에 맞는 집을 찾는 것이 가장 큰 일. 살고 싶은 집은 따로 있었지만 그 집은 내가 감당할 수준의 월세가 아니었다. 월세를 낮추기 위해서는 당연히 역에서 멀어져야 했는데 마침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원룸 중에서 내가 제시한 조건의 집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5분은 어림도 없었다. 실제로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원룸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탓에 부동산 중개인의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소위 말해 발품 팔아 찾은 집은 아니었다. 혼자서 집을 구하는 게 처음이었던 24살 그때의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는 모든 것이 어리숙해서 5분 거리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별다른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다. 속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내 집이 된 이후라 적응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다음 집을 구할 때는 직접 걸어서 확인하겠다는 지혜를 준 것으로 그냥 만족하기로 했다. 역세권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걷기가 익숙해질수록 10분이라는 시간도 나중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익숙함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것을 매일 몸소 느끼면서 내 집이 진짜 역세권에 위치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계약을 연장하면서 여러 해 살만큼 나는 그 집을 좋아했다. 서울 하늘 아래, 내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안이었다.     


- 원룸이라고 하더니 고시텔이구나?      


        그녀가 내 집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한 말이었다. 생방송 전날. 고작 한두 시간 눈 붙이고 다시 출근해야 했다. 같은 팀에서 일하는 작가 언니의 집이 인천이라서 내가 먼저 우리 집에서 자자고 했다. 언니는 그저 별 뜻 없이 한 말인 것 같았지만 나는 순간 당황했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지만 원룸이 생각보다 작아서 한 말로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어쩐지 내 소중한 공간이 무시당했다고 느꼈다. ‘내 집이 고시텔이라고?! 어딜 봐서?’     


        집을 구할 때 고시텔도 후보에 있었다. 원룸 월세보다 저렴한 곳도 있었지만 살기 괜찮다고 생각한 곳은 원룸보다 거주 환경도 좋았고, 그만큼 월세도 비쌌다. 때문에 내 원룸이 고시텔보다 훨씬 좋다는 게 맘 상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으로는 같은 조건이라면 ‘고시텔’로 불리는 곳보다는 ‘원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원룸’은 집으로 생각했지만 ‘고시텔’은 보증금을 만들 때까지의 임시 거처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자 집인데 고시텔이라고 정의 내린 언니의 말이 속상하고, 서운했다. 순간 마음이 삐뚤어져서 내가 먼저 우리 집에서 자자고 한 것을 후회했다.     


        한참 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무시의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무시당했다고 여긴 것은 ‘내가’ 고시텔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호텔처럼 만든 고시원, 고시텔이 많아졌다고 해도 내게 고시텔, 고시원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둡고, 비좁고, 저렴한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뿐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럭셔리 호텔 같은 고시텔을 생각했다면 내 방이 고시텔 같다는 언니의 한 줄 평에 오히려 좋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래전, 잠시 스쳐 지나갔던 나의 외모 리즈 시절에 나보고 연예인을 닮았다고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매일 거울을 보니까, 연예인을 닮을 정도로 인상적인 외모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고 한 사람은 달랐는데 한 명은 여배우, 다른 한 명은 개그우먼을 지목했다. 특이 사항이라면 대답에 따라 내 기분이 업이 되기도 했고 다운이 되기도 했다는 것. 배우라고 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도 기분이 좋았고, 개그맨이라고 했을 때는 내색은 안 했지만 실망했다. 두 연예인 모두 내적으로야 모르겠지만 외적으로는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내 반응이 달랐던 것은 은연중에 배우보다 개그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그맨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 나를 무시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올 뻔한 답이었다. 단지 내 생각이 그랬을 뿐.     


        '애매한 무시'가 있다. 애매해지는 이유는 기준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준이 오롯이 나의 판단에 달려있어서이다. 이 경우 스스로는 무시당했다고 느끼면서도 쉽사리 상대방에게 진위를 묻지 못하고 혼자서 불쾌해 하거나 계속 긴가민가하게 되곤 한다. 왜냐.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나만 우스워지니까.     

        무시당한다고 생각이 들면 누구든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애매한 무시’는 바로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때로 무시의 기준이 나만의 편견이나 고정관념, 자격지심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성급한 마음에 먼저 추궁했다가는 되레 사과를 하게 되거나 관계를 영원히 망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해를 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해를 받는 것은 기약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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