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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05. 2020

마음만 쓰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후회.

갑자기 몇 년 만에 물어볼 게 있다면서 대학교 동창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주 간단한 궁금증이었기에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을 해준 말끝에 그녀는 늘 도움만 받아서 고맙다 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에는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는 상황이어서 대충 얼버무리고 톡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내내 신경이 쓰였던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다. ‘늘’이라는 단어가 미스터리였다. 으레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도움을 준 기억이 내게는 없었다. 그녀의 부탁이라고 해봐야 내가 종사하는 분야와 관련된 간단한 부탁이나 조언. 기껏해야 세네 번 정도 될까. 그마저도 기억이 흐릿해서 그녀가 다 잊어버리고 산다고 해도 내 입장에서도 서운할 게 전혀 없는 것이었다. 왜 ‘늘 고맙다’고 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번도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고, 가뜩이나 부탁은 더 하지 못했다. 내 연락이 상대방을 귀찮게 하는 일은 아닐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같은 잡생각이 많았다. 행동에 앞서 혼자 너무 많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결말이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자기 복제되고 있었다.


나는 공감을 넘어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입’이 심했고, 나로 인해 상대방이 부정적인 감정을 겪게 되는 것을 못 견뎌했다. 그중에서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제법 컸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거절은 어렵다. 나에게 거절이 유난히 힘들었던 것은 내가 받은 거절 때문에 내가 겪은 좌절이 적지 않아서였다. 내가 너무 힘들고 아팠으니까, 그 사람도 힘들 거라고 상대방 입장을 내 마음대로 추측해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팩트를 방패 삼기보다 늘 상대방 마음에 신경을 더 썼다. 때론 미안함이었고, 때론 안쓰러움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도 대수롭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 언저리에 항상 가시처럼 걸렸다. 그러다 보면 상대에게는 벌써 끝난 일이 나에게는 훨씬 오래 남겨져 있을 때도 있었다.


거절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거절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 가능한 내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고 남들에게 부탁을 하거나 먼저 제안하는 일 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세상(a.k.a. 집순이)에서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은 건 나와는 반대로 먼저 연락을 잘하는 지인들이 주변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그게 고마웠다. 나는 수없이 고민만 하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하는 일을 용기 내서 하는 ‘심플함’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 사이에 연락도 항상 그녀가 해왔다. 그녀라고 나처럼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움의 크기를 떠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던 것은 내가 매번 놓지 못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서로 연락을 자주 했더라면 그녀가 그 정도로 미안해할 일도 고마워할 일도 아니었을 텐데...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키운 느낌이었다. 도리어 고마운 건 나였다. 나는 아닌데, 아주 사소했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그 정도쯤 그냥 지나쳐도 되는 일인데 마음을 다해 고맙다고 말해준 것도.


돌이켜보면 마음이 다치지 않으려 너무 많은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여려지기만 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세상의 모든 말을 막을 수는 없는데 굳은살을 만들지 못한 마음은 계속 다치기만 했다. 다친 마음은 그대로 닫혀버렸다. 내 마음도, 내 사람들도, 내가 지킨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보호를 위함이든, 배려를 위함이든 마음을 쏟는 것도 적당함이 필요하다. 마음만 쓰다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나를 위한 지나침은 다가올 수 없는 철벽이 되어버리고, 상대를 위한 넘침은 오히려 무심함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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