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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09. 2020

모험을 하지 않는 나, 그게 나였다.

열 일하는 AI, 당신의 취향은 여전히 아름다운지...

한 곡에 꽂히면  ‘한곡 반복’으로 질릴 때까지 듣는 건 내 오랜 습관이다.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걸 계속 들을 수 있는데 일부러 다른 것에 시간 뺏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까. 어떤 건 하루에서 끝나고, 어떤 노래는 몇 달을 들은 적도 있다. 플레이리스트에는 댄스곡도 있지만 내 고막을 가장 오랫동안 차지하는 건 발라드다. 노래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를 ‘곡이 좋아서’와 ’ 가사가 좋아서’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내 대답은 가사다. 책이나 영화처럼 노래도 한 편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그런 나에게는 곡보다는 늘 가사가 중요했고, 상대적으로 가사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발라드가 좋았다. 청소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소위 말하는 ‘노동요’도 집중이 더 잘 되는 발라드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탓에 어쩌다 이어폰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될 때면 ‘왜 우울하게 맨날 발라드만 들어?’라는 소리를 예외 없이 들어왔다.


원래도 한번 좋아하면 마음이 잘 안 바뀌는 편이기는 했다. 나로 말하자면, ‘배달 음식점에서 내 입에 맞는 메뉴를 찾았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처음 시킨 그 메뉴만 시켰다. ‘뉴페이스’보다는 ‘안전빵(?)’을 선호한다고나 할까. 아무리 내 취향이 ‘다양성’이 아니라 ‘요지부동 형’이라고 해도 그렇지, 올여름에도 내내 발라드만 들었다. 우연히 누른 ‘유사곡 추천’의 재미를 톡톡히 봐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내가 잊고 있었던 곡들까지 완벽 맞춤으로 찾아주는 신세계.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억 속의 곡들을 찾아서 하이에나처럼 헤맸다. 마침내 내 플레이 리스트는 죄다 철 지난(!) 발라드 곡으로 꽉꽉 채워졌다.


비단 음원 사이트뿐만 아니라 유튜브, 넷플릭스, 포털사이트에서도 맞춤형 추천이 난무(!)하고 있다. 물론 한두 번 클릭에 내 취향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그렇겠지?) 가끔은 뜬금없는 것까지 추천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게 내 취향이 이라고?’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나보다 똑똑한 AI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하지만 AI가 분석한 내 취향은 여전히 미스터리일 때가 많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흥미가 생겨도 클릭을 망설이게 됐다. 우연한 클릭이 기대 이상의 흡족함을 줄 때도 있었지만 단순 호기심으로 그칠 때가 많았고,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냥 한 번 클릭한 게 원인이 되어 ‘맞춤형’이라는 이유로 내 타임라인을 어지럽히는 게 싫었다. (삭제하면 되는데 그게 또 번거로운 나의 귀차니즘이여...)


‘맞춤형 추천’이 등장하고 직접 찾는 수고스러움이나 시간 낭비가 예전에 비해 확실히 줄어든 것은 맞다. 그에 따라 내가 겪은 부작용은 점점 더 보던 것만, 듣던 것만, 읽던 것만 읽게 된다는 것. 내가 기존에 알던 것이 아닌 새로움도 소위 말해 검증된 ‘네임드’만 찾게 됐다. 돈이 돈을 부른다고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가 사람을 불러 모은다. 이제 어디든 ‘TOP 리스트’나 ‘추천리스트’에 오르지 않으면 주목받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이 됐다. 특히 나 같은 ‘안전빵 주의자’에게는. 그러다 보니 ‘새로운 취향 발견’은 내 취향을 일일이 검색하고 찾아다니던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문득 ‘취향 맞춤’이 아니라 ‘취향 편향’이나 ‘취향 조종’은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언젠가 새로운 것을 원하기는 하면서도 낯섦 아니, 실패가 싫어 검증된 선택만 하는 나를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나는 왜 돌다리를 두드리느라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지 답답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바꾸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굳이 나도 ‘트렌드세터’나 ‘얼리어답터’가 되려고 했다. ‘남들보다’는 아니어도 ‘남들만큼’은 알아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에 나에게는 무용지물인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잠시 잠깐 마음 주다가 결국은 ‘나스러움’이라는 본진(?)으로 돌아올 거면서 말이다.


어떤 일들은 결과는 나중 문제고 ‘모 아니면 도’나 ‘아님 말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볍게 하고 도전해야 되는 일들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 다 하면 시작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생각을 덜어낼 수가 없었던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불행 회로’를 돌리며 내가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나는 ‘안전주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모험을 하지 않는 나, 그게 나였다. 오랜 헤맴 끝에 나는 나만의 속도를 받아들였다. 왜 도전하지 않느냐고 나를 꾸짖는 대신 만에 하나까지 계산하는 쪽을 칭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중함을 얻었다.  


출근길, 신호등의 파란불이 10여 초밖에 남지 않아 불이 깜빡일 때, 지하철이 금방 도착할 것 같지만 내 탑승이 아슬아슬할 때 당신이라면? 나는 거의 뛰지 않는다. 아니, 뛰지 않도록 움직인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상황까지 나는 이미 계산을 끝마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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