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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26. 2020

사장님, 우리 여기서 더 오래오래 해 먹어요(?)

지금의 집에 살게 된지도 8년이 넘었다. 이웃과 왕래가 전혀 없는 내가 나만큼 이 동네에 오래 상주(!)하는 사람을 딱 한  알고 있다. 바로 집 앞 편의점 사장님. 내가 이사 오고 몇 개월 뒤에 가게를 오픈했으니까 어림잡아 7-8년은 됐을 것이다. 편의점은 2-3평 남짓. 손님 세 명만 들어가도 쇼핑(?)하기 불편했다. 이 동네 여러 편의점을 다녀봤지만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 위치도 대로변이 아니고, 동네 한쪽 구석이라서 절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느 가게 사장님처럼 몇 달 후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도 나도 아직 이 동네에 있다.


동네 곳곳에 박혀 있는 여러 편의점 중에 내가 그곳을 주로 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집에서 가장 가까웠다. 점포 규모 상 없는 것도 많았고, 애초에 몇 개 들여놓지 않아서 금방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그곳을 용했다. 상권으로는 그 위치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거리가 너무 최적화였다. 8년이라는 시간이 말해주듯 장사가 아예 안 되는 위치는 아닌 것 같기는 하다.


동네 특성상 오피스텔, 원룸이 대다수 주거형태이기 때문에 2년 단위 ‘거주지 유목민’들이 많았다. 거기다 유명한 맛집도 아니고 동네 편의점을 잠시 함께 공유(?)한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기억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장님이 나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습관성 단골’이 된 지 4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나를 기억하지 않았던 시절이라고 해서 사장님이 딱히 불친절했던 건 아니다. 내가 변함없었듯 그도 한결같았다. 맥주, △△요플레, 바나나 우유, 삼각 김밥은 내가 편의점에 갈 때 거의 빼놓지 않고 사는 품목이었다. 어느 날 편의점을 들어서자마자 그가 말했다.

 오늘은 △△요플레가 방금 나갔는데,
조금만 일찍 오시지

다른 건 없으면 대체 상품을 샀지만 △△요플레는 아니었다. 그것만 고집했다. 그걸 그가 기억한 것이다. 신기했다. 그다음 방문 때도 그것만 없었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있으면 먹는 거였고 없으면 패스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사장님은 원래 한 개만 들여놓는데 이제 2개씩 주문해야겠다고 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 없는데...’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대신 전보다 자주 방문해 ‘나의 요플레’를 데리러 갔다. 어쩔 수 없이 자주 못 갈 때는 ‘내 요플레 어쩌지’라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었다.


내가 구입하는 △△요플레는 대형 사이즈였다. 보통 편의점에서는 작은 사이즈 일회용 숟가락을 함께 준다. 어느 날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이 요플레 숟가락을 햇반용으로 바꿔줬다. 작은 것보다는 그게 더 편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써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날부터 말하지 않아도 늘 대형 숟가락이었다. ‘단골이 좋긴 좋구나’ 실감했다. 하루는 사장님이 없고 다른 사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못 온 며칠 사이에 가게를 정리했나 보다 했다. 요플레 숟가락이 다시 작아진 것에서 그의 부재를 느꼈다.


다행히 내가 본 새 사장님은 그의 친구였다. 일선에서 퇴직 후 휴일에 아르바이트 삼아 대신 점주 노릇을 해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문했을 때 그가 없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기분 좋아진 김에 캔 맥주를 잔뜩 샀다.

 혹시 맥주 전용잔 필요하세요?


오랜만에 돌아온 그가 물었다. 완전 필요하다고 말하니 그가 물품 보관소로 향했다. 내가 산 것과는 다른 맥주 브랜드에서 나온 전용 잔이었다. 행사하고 남았다면서 따로 챙겨줬다. 마치 편의점 VIP가 된 것 같았다. ‘사장님, 우리 여기서 더 오래오래 해 먹어요(!)’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소하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사장님의 여러(?) 마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만들어주는 특별함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시간에 길들여지면 의미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힘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어제 같은 오늘이고, 오늘 같은 내일의 반복일지라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 매일이 자신의 생에서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 적당한 때를 아직 못 만난 것뿐, 절대 낭비가 아니다.  그러니 당장 무엇이 되지 않았다고 시간을 다그치지 말기를. 지금의 의미는 오직 이 시간이 지난 후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혹시라도 후회를 하게 될까 봐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함에 마음만 너무 앞서갈 필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마음보다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자신에게 한낱 시간을 주는 배려. 기대보다 꽉 채워지지 않은 하루하루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시간은 낭비도 나태도 될 수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나는 요즘도 요플레 숟가락 크기에서 그의 부재를 느끼고 있다. 아마 그는 내가 요플레를 데려오지 않음으로써 나의 공백을 알게 되겠지. 그 어떤 연락을 하고 있지만 않지만 서로의 근황을 요플레로 알 수 있는 사이. 8년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그런 사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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