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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ug 23. 2020

수많은 ‘처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누구처럼’이 ‘나처럼’이 되기까지의 시간들

‘남들처럼’이 선택의 기준이던 때가 있었다. 세상의 기준보다 앞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평균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 생각의 기원에는 초중고 학창 시절, 평균 깎아 먹는 그룹을 ‘문제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절대적이었다. 그 시절, 내 세상의 80% 이상이 학교였으니까. 모범생이 되기에는 노력이 부족했고, 문제아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넘쳤다. 덕분에 ‘남들처럼’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따르는 삶이 내게는 익숙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어중간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그땐 엄마도, 나도 몰랐다. 나는 절대 어정쩡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학에 들어가면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며 평범한 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를 영업(?)하는 선배를 보고 ‘학보사’로 마음이 바뀌었다. 고작 나보다 한 학번 위일 뿐인데, 엄청난 언변의 소유자였다. 선배의  논리 정연한 설득의 기술에 거절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도 ‘선배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었다. 그것의 밑바탕에는 선배만의 확실한 주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신문사의 구성원이 되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오해했다. 기자는 어떤 방향으로든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내가 가진 '따라쟁이' 마음만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의 학생 기자 신분은 두 학기 만에 중도 포기라는 불명예(!)로 급하게 마무리됐다. 언론 정보학을 전공하면서도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이때 내 한계를 지독히 깨달아서였다.


진로에 대한 확신 없이 어영부영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사실 토익 점수나 자격증 같은 스펙이 필요 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준비하는 친구들에 비해 내 꿈이 너무 튀는(!) 게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내가 괜히 허황된 마음 품고 있나 싶어서 ‘친구들처럼’ 되기로 생각을 돌렸다.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나름 버둥거렸지만 방향성을 잃은 노력이 결과를 가져다주기에는 의지가 턱없이 빈약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공부가 될 리 없었다. 마음을 돌리던지, 목표를 바꾸던지 결단이 필요했다. 시간과 돈만 버린 채 다시 처음 그 마음으로 목표를 유턴했다.


그래도 다행히 원하던 일을 하게 됐다. 내가 하는 일에서 나는 내 이름보다 ‘어떤 프로젝트’를 했던 사람으로 증명됐다. 당연하다. 나는 백종원도 아니고, 유재석도 아니고, 이효리도 아니니까. ‘화려한 조명처럼’ 나를 감싸는(!) 일이 필요했다. 돌고 돌아 업계에 몸담은 지 4년 만에 기회가 왔다.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자리였지만 정작 나는 마음이 너무 부대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내가 나여서는 안 됐다. 어떤 식으로든 더 갖추고, 때에 따라서는 나를 버려야 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몇 번이나 다시 도전했다. 하다 보면 내가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고, 인정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만 다칠 뿐이었다. 나는 나를 놓는 대신 내가 품은 야심을 내려놓았다. 그 후로는 내가 나인 채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포기나 단념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없었다고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그게 오랜 시간 돌아서 알게 된 나였으니까.


나는 줄곧 내가 ‘누구처럼’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는 ‘나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많은 시간 내가 방황했던 이유는 그들처럼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나는 때로 평범하고, 때로 주목받고 싶고, 때로 아무것도 아닌 나였다. 이 모든 것이 누구처럼 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나’는 아니었다. 그걸 몰라서 나 스스로를 많이 괴롭혔다. 내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서른이 지나고 나서였다. 확실히 그 전보다 내 바람들은 대체적으로 다 소박해졌다. 꿈이 초라해졌다기보다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아는 내가 되었다고 믿고 싶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은 내 지난 시간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처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 했다. ‘누구처럼’이 ‘나처럼’이 되기까지의 시간들에 감사하다.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있었지만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되지는 않았다. 덕택에 나는 조금 더 나다워졌고, 단단해졌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잘 견뎠다고, 애썼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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