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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10. 2020

내 사람들의 진가는 내가 빛을 잃었을 때 나타났다.

‘사회생활 중2병 시즌2’ 시기에는 내가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었다. 방송작가로 일한 지 3-6년 차쯤 됐을 때였다. 그때로 말하자면 멋모르고 어리바리하던 때에서 벗어나 눈칫밥으로 배운 업계 생리를 제법 알아채던 때였으므로 이 정도면 나도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생각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도 곧잘 했고, 눈치도 빨랐고, 센스도 있었다. 당연히 나를 찾는 곳도 많았다. 이러다가 나도 ‘1%의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부푼 꿈을 매일 어깨에 얹고 다녔던 것 같다. 일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 위치, 아니 시기였다. 그때는 내가 잘 나서 그런 건 줄로 생각했지만 그냥 그런 시기였다. 업계에서 가장 금값인 연차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5-7년 차다. 팀 세팅을 할 때 같이 일하기로 구두 약속했다가도 잠시 잠깐 한눈팔고 있으면 누구라도 낚아채 갈 만큼 워낙 찾는 곳이 많았다. 한 마디로 연차가 깡패(!)였는데 나는 나라서 그런 건 줄 착각했다.


정도(正道)를 지킨다는 것은 그때보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안다고 해도 과연 지키고 살 수 있을지는 더욱 확신 없지만... 자만심이 전부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싶은 부당함은 1도 참지 않았고, 모든 것을 말로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내가 아쉬운 건 있어도 지금도 부끄럽지 않은 건 내가 뱉어낸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청춘 기록> 안 정하(박소담)가 그랬다. ‘누구나 가슴속에 쌍년(!)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라고. 그래, 일부(!)는 가슴에 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던 나의 자신감은 돌고 돌아 후회를 안고 어느 날 비상 착륙했다. 한번 땅에 닿은 자신감은 땅을 파서 지하로 들어갈 기세일 뿐 좀처럼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자연스레 상황이 역전됐다. 지금은 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만 내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어쩌면 나 빼고 모두. ‘아니, 내가 뭐라고’ 싶으면서도 고마웠다. 수많은 내상(?)을 입으면서 내가 느낀 건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절대 흔치 않다는 것.


언젠가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선배가 다시 같이 일하자고 연락이 왔었다. 당시는 앞서 말한 내가 아주 잘 나가던 시기로 다른 곳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선배를 따라갔다. 조건이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선배만 보고 선택했다. 그만큼 선배를 따랐다. 퇴근 후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선배는 술김에  고백했다. ‘다른 애들한테 같이하자고 하기에는 자리가 좀 그래서... 근데 너는 나랑 하는 건 뭐든 다 좋다고 했잖아 고마워’ 그 말의 방점은 분명 뒤, '고마워'에 달려있었다. 업계 메이저에서 멀어진 선배의 신세를 푸념하는 의미였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서운하기는 했어도 선배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내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는 일이라면 조건을 크게 따지지 않은 건 나지, 선배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저 가슴에 품고 있는 게 더 좋았을 말이었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이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음을 알아버렸다. 선배를 존경했던 나에 비해 선배에게 나는 기타 등등에 불과했다는 것을.


아마도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내 사람들’을 찾기 위한 과정들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더 고군분투했다. 잡은 물고기는 먹이를 안 준다는 말처럼 새로운 물고기를 잡는 데 더 치중했다. 어리석게도 그런 내가, 그들에게는 이미 잡힌 물고기인 줄도 모르고...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어항을 만들어주고, 물을 갈아주고, 산소를 넣어준 건 정작 그들이 아니었다. 바보처럼 내가 당연한 듯 여겼던 지금의 내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잘 몰라주는 나의 가치에 가장 높은 값을 매기고 기를 세워주는 내 사람들. 처음에는 그냥 하는 위로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10년을 넘게 하는 그들의 근성에 내가 그들의 진심을 함부로 봤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내 사람들을 볼 줄도 모르고, 도대체 아는 게 뭔가 싶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 사람들의 진가는 내가 빛을 잃었을 때 나타나고, 그들의 진심은 나든, 다른 사람이든 혼자서 빛나게 됐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는 것을.


또다시 빛을 잃어버린 지 좀 됐다. 끝없이 가라앉아버린 마음에 용기 잃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매일 인공호흡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 놓지 말아야지. 다시금 한 호흡 차근차근 나만의 페이스를 찾아야지. 내 사람들이 언제까지 나에게 위로만 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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