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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Sep 22. 2020

뒤늦게 사실은 '친하지 않다', 고 말했다.

- 그 사람이랑 친해요?     


        나에게 그녀를 소개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다음 날이면 내게 묻던 질문. 친하다고 대답을 하면 ‘정말?’이냐고 되묻는 말도 어김없이 매번 따라왔다.      


        그녀와 나는 같은 프로그램을 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사이였다. 인간관계가 다분히 폐쇄적인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특히나 내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내가 제안하지 않았는데도 자기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할 때면 나와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 보통은 그런 사람에게 자체 거리 두기를 했던 나였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그녀에게 오히려 더 끌렸다.      


        ‘친하다’와 ‘친하지 않다’는 경계를 지금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나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친하다고. 내가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은 것도 아닌데 그들이 적잖이 당황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준비해둔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그제야 그들이 예상한 나의 대답이 ‘안 친해’였음을 눈치챘다. 내 대답을 너무 장담했던 탓에 꺼내려던 말을 도로 집어넣고 다른 말을 하려니 입술과 혀의 재부팅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내가 취해 있는 동안 술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계속 추궁을 해도 원래 하려던 말로 직진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그 술자리‘들’의 전말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 내가 그녀와 인연을 정리하고 나서였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가 내 지인, 그중에서도 남자들에게 한 행동은 주사로도 포장할 수 없는 추태.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었다. 기가 찼다. 내가 아무리 술을 얌전하게 마셔도 잘못했다고 해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게 나로서는 억울했지만 뒤늦게나마 그들에게 사과했다. 불쾌했음에도 참았던 것은 다 나 때문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모른 척 당연하게만 받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그녀는 나와 친하다고 대답했을까. 그때는 나와 같거나 비슷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을 거라는 확신이 뒤늦게 들었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다양한 사람, 노골적으로는 남자들을 알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던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내 지인들에게 거침없이 행한 그녀의 스킨십은 단지 술기운이라고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를 옆에 두고 서도 말이다. 이성의 끈을 놓치기 전 마지막 딱 한순간이라도, 내 입장을 한 번이라도 고려했다면 거절 의사를 밝힌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그럴 수는 없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라는 걸 알지만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니다. 그래, 내가 그녀를 안다고 착각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만 보았을 뿐 이렇다 할 단점은 거의 알지 못했다. 과연 그게 정말 주사였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나와의 술자리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1%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친하다는 게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한 것이고, 안 친한 것인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구와 친하고, 누구와는 친해지는 중이며, 안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 과연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와 친하다고 생각할 것인지. 그 사람과 합의 없이 내 생각만으로 친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친한 사이에는 어디까지가 이해의 범위이고 지켜야 할 예의일까에 대해서도.     


        고민하면서 깨달았다. ‘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왠지 모르게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마치 내가 인간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 죄책감과 불안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나 스스로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그 사람과 친해?’라고 물어보면 웬만하면 친하다고 말해버렸고, 더 나아가서는 조금이라도 더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서 내 분수에 맞지도 않은 이해와 배려, 노력을 남발했다. 나 스스로는 내키지 않아 했으면서도 그녀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주선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이없는 건, 그런 내 욕심 때문에 발생한 여러 불쾌함은 오로지 내 지인들이 감당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것. 친해질 필요 없었던 사람 때문에 정말 나와 친한 사람들에게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누가 봐도 의심할 여지없는 친한 사이는 그 누구도 친한 사이냐고 확인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에게 ‘그 사람과 친하냐’고 물어본다면 관계의 깊이를 물어본 게 아니라 서로의 진심을 물어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냐? 이 관계를 확신하냐? 당신처럼 상대방도 그러한가? 그런 점에서 ‘친하다’는 대답은 거짓이나 허황된 마음으로 함부로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내가 보증한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나 때문에 내 사람들이 감당해야 되는 몫도 생긴다는 의미다.     

 

        그녀는 나와의 인연이 멈춘 후에도 ‘내 지인들’에게는 연락을 꾸준히 했던 모양이었다. 나라면 연락하지 않았을 텐데... 맞다. 그녀는 내가 아니다.  이제 ‘자기의 지인’이라고 여겼을지도... 다시 한번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우린 애초부터 ‘친해질 수 없는 관계’였음을 자각했다. 지인들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녀를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실은 친하지 않다는 내 고백을 들은 후에야 그들은 그녀를 완전히 놓았다. 고백이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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