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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Oct 26. 2020

나는 몇 번째 보험이었을까?

 ‘역지사지’라는 벌.

        밤 9시. 많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모 작가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선배가 아는 제작사에서 준비 중인 이벤트 행사를 맡아줄 작가 섭외 때문이었다. 적당한 작가를 찾고 있는데 나더러 해보라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원고료, 투입 기간 등 여러 조건을 따졌을 텐데 마침 일을 쉬고 있을 때이기도 했고, 선배가 소개하는 자리고, 밤에 온 연락인 만큼 급하게 작가 세팅을 해야 되는 것 같아서 나는 더 재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내 연락처는 선배를 통해 그쪽에 넘겨졌다. 그게 나흘 전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같이 하자, 말자 연락이 없었다. 이럴 경우 답은 세 글자. 까. 였. 다!      


        그들의 섭외 리스트에서 내가 몇 번째 순위의 사람이었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기대했던 경력을 가진 1안의 작가는 아니라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지인을 통해 소개를 받았음에도 내가 까인 것이다. 그것도 무통보로 대차게!!! 사실 나의 일이란 게 늘 누군가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되는 직업이라서 전혀 낯선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숱하게 겪어왔어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가려는 ‘모른 척’은 매번 적응되지 않는다. 울컥 화가 나서 급속히 지하 4층 깊이로 내려간 기분은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 나는 또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역지사지’라는 벌을 말이다.     


    오래전 한 예능 프로그램 MC를 섭외할 때였다. 섭외라는 게 베스트로 생각하는 1안이 처음부터 섭외되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에 보통은 적게는 3명 많게는 5명을 정해놓고 거의 동시에 전화를 돌린다.     


- MC 제안에 대한 피드백은 제가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정확히 그날만 세 번째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정한 3순위 진행자였다. 그때가 작가 일을 한 지 7년 언저리였을 무렵. 확답을 받지 않고 대충 통화 뉘앙스만으로도 ‘되겠다, 안 되겠다’를 80% 정도는 맞출 수 있을 때였고 틀렸을 20%에 대해서도 대응이 나쁘지 않을 때였다. 내 감에 의하면 매니저는 MC 제안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애매모호하게 말만 돌리고 있었다. 나는 80% 이상의 확신을 얻기 위해 그를 한 번 더 재촉했다.     


- 실장님, 저희 첫 방송까지 시간이 좀 빠듯해서요. 

  안 된다고 하시면 제가 다른 분도 컨택해야 하거든요.....     


    느낌, 감, 소위 말하는 ‘짬바’라는 게 나 혼자서만 느는 게 아니다. 그 역시 나 같은 작가를 매일 수도 없이 상대하는 사람. 내가 수락 여부를 예측하듯이 그도 제작진의 섭외 진의를 계산기로 두드리고 있을 것이었다.       

- 작가님은 제가 밀당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맨날 빨리 결정해 달라고 해서 OK 하면 

  이리저리 간만 보다가 일방적으로 캔슬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당해서요     


    그의 계산기는 오차 없이 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거짓말로 감춰보려 한들 그에게 소용없었을 것이다. 업계에서 섭외는 서로 간에 안 될 가능성도 담보로 하는 구두 약속이었다. 그는 이미 수차례 약속이 깨지는 상황을 겪었기에 나의 계획을 처음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맞다. 지금 당장 그가 OK를 한다고 해서 바로 MC로 확정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녀보다 앞서 전화한 1, 2안 연예인 측의 검토를 기다릴 것이었고, 설령 그들이 다 거절한다고 해서 그녀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많은 경우 또 다른 1, 2안을 찾을 확률이 높았다. 나쁘지는 않지만 결코 베스트는 될 수 없는 게 3안의 위치였고, 최악의 상황은 피하기 위해서 들어놓는 ‘보험’ 같은 존재였다.     


- 작가님, 저 진짜 시원하게 대답하는 편인데 

  그때마다 제 연예인이 까이니까 이게 상처가 되더라고요. 

  지금으로서는 스케줄은 가능하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어요. 

  잘 검토해보시고 정말... 저희랑 하실 생각 있으시면 

  그때 다시 연락 주세요.     


        분명 그건 밀당이 아니었다. 그저 하소연이었다. 그의 진심에 내 저의는 도망쳐야 했기에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그의 예상대로 내가 그에게 다시 전화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내가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아마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은 섭외 리스트에서 1안으로 꼽혔던 연예인이 하게 됐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에게는 다시 연락하리라 마음먹었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내가 팀을 옮기면서 연락을 하기가 애매해졌다는 것은... 솔직히 핑계다. 먼저 같이 하자고 제안해 놓고 없던 일로 해야 되는 상황 때문만도 아니었다. 선택을 받지 못한 건 아쉽고 속상하지만 그가 그랬고, 내가 그렇듯 우리 일에서 이런 경우는 너무 비일비재하니까.      


        잘 감추고 있다고 믿었던 ‘간 보기’가 들켜버렸고, 다 알고 있음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던 그의 마음을 보험처럼 여기려 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비록 작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못 할 짓을 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설득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미안함이 나도 모르게 마음의 굳은살로 박혀버린 탓일까. 그 후로 어쩌다 한 번씩은 그와의 통화가 생각나곤 했다. 입장이 바뀌어서 오늘처럼 내가 까일 때였다.


누구나 처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오늘 또다시 처지가 바뀐 나는 부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몇 번째 보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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