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에게 직업을 물어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내 직업을 물어볼 때면 나는 대부분 두루뭉술하게 ‘프리랜서’라고만 말한다. 그 정도에서 ‘그렇구나’ 하고 마는 사람들이 있고, 프리랜서의 분야가 다양하니까 어느 쪽이냐고 한 번 더 물어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이벤트, 홍보나 광고계 쪽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본업은 아니고 서브 잡으로 했던 일이다. 처음부터 직업을 밝히는 것을 꺼려했던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확실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소 무책임한 답변이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이 적당할 것 같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소모만 되거나, 속절없이 뺏기기만 할 때가 있다. 워낙에 '집순이' 기질이 넘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경우,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대부분의 만남에서 에너지가 채워질 때는 없었다. 특히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쉽게 지쳤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폭은 한없이 줄어들어 지금은 거의 5년 이상은 기본이고 대개는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만 곁에 남았다. 지금의 내 사람들도 처음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인연. 도대체 어떤 차이가 다름을 만들어내는 걸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나도 궁금해하느냐, 나의 직업만 궁금해하느냐’의 차이였다. 이를테면 나보다는 내 직업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할 때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 흥미를 쉽게 상실했다.
내 일은 주로 방송 작가라고 불리는 구성작가이다. 지금은 다양한 플랫폼에서 일할 수 있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할 할 때는 고작 지상파 방송국 몇 개와 다수의 케이블 채널이 전부였다. 흔하지 않았고, 다른 업계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신기한 일을 하는 사람에 속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직업을 말하면 상황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 연예인 그 소문 진짜예요?
- 연예인 누구랑 친해요? 진짜 예뻐요? 잘생겼어요?
- 방청권 좀 얻을 수 있어요?
- 콘서트도 공짜로 가겠네요?
사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궁금증이라 질문 자체가 이상할 것은 없었다. 때로는 그게 전부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방불케 하며 쏟아지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연예인들과 나는 단지 일로 만난 사이. 많은 이들이 비즈니스로 만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지 못하듯, 나 역시 내가 맡은 일을 할 뿐 그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 만큼 연예인들의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정말 몰라서, 혹은 알지만 아는 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그 대화가 즐겁지 않아서, 방송업계를 주제로 이야기가 흐를 때면 나는 최대한 말을 줄였다.
- 저도 기사 보고 알았어요
- 그러게요. 하하! 저는 친한 연예인이 없네요
- 아, 방청권이요? 한 번 물어볼게요
- 초대권은 가끔, 아주 가끔이요
서로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Q&A' 시간이었다. 연예인에 대한 질문이 끝나면 다음 라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디션장의 심사 위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동안이라는 말 많이 듣는데, 저 몇 살로 보여요?
- 사람들이 저보고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어때요?’
촬영장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동안인 사람들이 차고 넘쳐서 나는 웬만하면 ‘동안’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 매번 ‘재미 포인트’를 고민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유머러스하다는 기준도 평균보다는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한껏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나는 끝없이 고민해야 했다. 저 사람은 원래 몇 살일까? 주변 사람들은 몇 살로 보인다고 했을까? 내가 몇 살이라고 말해야 저 사람이 실망하지 않을까. 재미있다고 하면 저 드립을 계속 칠까? 그냥 사실대로 재미없다고 말하는 게 나을까.
매번 반복되는 그 상황이 나는 너무 난감하고 괴로웠다. 물론 나를 힘들게 하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란 걸 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스로를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질문이나 대답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점점 더 직업을 말하기가 꺼려졌고, 대신 ‘프리랜서’라는 말로 질문의 늪을 피해 갔다.
몇 년 전 절친 메이 언니와 터키 패키지여행을 갔을 때였다. 함께 한 일행들이 조심스럽게 나와 메이 언니, ‘우리의 직업’을 물어봤다. 둘이 유머 코드도 잘 맞는 것 같고, 말도 재미있게 한다면서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그때가 여행 말미였다. 일주일 넘게 함께 다니면서 친해진 터라 그랬는지 고민하지도 않고 나는 단박에 방송 작가라고 대답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 와~ 역시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재미있는 일 하시네요
- 에이... 남들 보기에만 화려해 보이고 말이 프리랜서이지 그냥... 뭐... 비정규직이에요.
나는 한술 더 떠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까지 했다. 내가 쓸데없는 너스레까지 떠는 동안 메이 언니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거들지 않았다. 잠시 후 일행들과 떨어져 언니와 단둘이 걷게 됐을 때, 오랜 침묵을 깨고 언니가 입을 뗐다.
- 나는 네가 우리 일을 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주 오랜만에 낯선 사람에게 한 직(업커) 밍 아웃. 솔직해지기는 했지만 방어 심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언제나처럼 ‘어떤 프로그램하셨어요?’를 시작으로 이후에 따라올 질문을 사전 차단한답시고, 쿨한 척 시니컬하게 대답한 게 화근이었다. 내 말이 소위 말하는 디스(disrespect)하는 것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언니의 말이 더 아프게 들렸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내 일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남들에게는 싫어하는 사람처럼 말했다는 것. 지레짐작으로, 원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질까 봐 앞서간 불길한 생각 따라 내뱉은 말이 마음까지도 오해받게 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내가 진심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서툰 내 진심 때문에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일이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일이 추락했다.
그 순간의 나를,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