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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an 10. 2022

‘발신인 없는 상처’는 매일 도착한다.

완전히 상처받지 않을 방법


 ‘너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남들 생각, 남들 행동까지 다 네 마음대로 정해놔야 마음 편하지?’  

         

        유튜브 추천 동영상을 보다가 꽂혀버린 웹드라마 대사.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내 마음이 훅하고, 찔려버렸을까.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마음에 대한 의문은 얼마 후 한 데이트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풀렸다.     


 ‘특이하다는 말, 많이 듣죠?’     


        여자는 데이트 상대에게 묻는다. 하지만 정말 그런 남자인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겉으로만 질문으로 보일 뿐, 이미 그녀 안에 답은 남자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것 같았다. 특이한 사람이 맞다고. 아니, 그 질문이 던져진 순간 남자는 반드시 특이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남자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은 것은 그런 여자의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잠깐의 고민 끝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남자는 인정했지만 솔직히 그런 평가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두 사람의 데이트를 지켜보면 남자는 평범 그 자체였고, 오히려 여자가 상대적으로 특이한 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그 남자는 ‘특이한 사람’이어야만 했을까. 그때 다시 저 대사가 떠올랐다 ‘너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남들 생각, 남들 행동까지 다 네 마음대로 정해놔야 마음 편하지?’          

 

        나는 그녀에게서 지난날의 나는 물론, 어쩌면 현재의 나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았다. 상대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끝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짝사랑을 끝내기 위해 고백을 한 그 순간, 그에게서 되돌아온 마음이 내 기대와 다를 때면 여지없이 그랬다. 마음을 거절한다는 것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내가 싫다는 의미까지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어쩐지 나는 전혀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거절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마음일 뿐인데도,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다고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나를 점점 더 ‘부정적 예측러’로 성장하게 했고, 심지어 분야 확장까지 거듭한 끝에 인간관계, 사회생활 전반에서 그런 모습은 두각을 나타냈다. 상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정적인 반응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면 웬만해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진짜 의중을 묻지 않았다. 어떤 말도 묻지 않고, 듣지 않음으로써 ‘여지가 있는 ‘ing 상태’로 두는 것, 그것이 내가 택한 ‘거절당하지 않는 법’이자, ‘잠정적 해피엔딩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실패하지 않기 위해,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나의 노력은 이다지도 미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미련을 떨어도 ‘No’라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순간은 결국 오기 마련. 그럴 때면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어벽이 되어줄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이 일순간 ‘나쁜 사람’이 되기도 했다. ‘사실 내가 감당하기에는 자아가 너무 강하잖아? 자기밖에 모르고, 주변에 여자들도 너무 많고... 완전 별로야, 별로.’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 팩트 체크가 필요 없는 이유는 얼만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유를 만들어내면 낼수록 애초에 그런 사람을 좋아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갈 뿐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보다는 상대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약 그 엇갈림에 반드시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매일 조금씩 일방적인 기대를 걸었던 나임에도 내 절망의 책임을 오롯이 상대에게만 돌리고 나를 철저하게 피해자로 치부하는 것. 그것이 나를 지키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자, 가장 치사한 방법이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받은 상처가 더 중요했던 사람.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내게 상처를 주고자 했을까. 혹시 모든 것을 상처로 정의하고 좌절의 늪에 가두어 두었던 것은 철저하게 나만의 일방적인 해석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생각이 흐르는 방향은 자기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상처 주지 않는 일 보다 상처받지 않는 길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른다. 상처 주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의 결정에 달려있고, 반대로 상처받지 않는 일은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에 달려있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은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자신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경험이나 과정, 성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다 부정과 거절, 실패라고만 생각했다. 그 결과,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치면서도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부터 수없이 상처받아야 했다.


        생각하기 나름. 때로 그 길은 정신승리일 수도 있겠다. 가끔은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고. 그런데 뭐 좀 그러면 어떤가. 생각이 조금 내 멋대로라고 할지라도 끝없이 나를 학대하고, 누군가를 억지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원망하는 것보다 상처 주지도, 상처받지도 않아도 되는 ‘이너 피스 방정식’이지 싶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남들 생각, 남들 행동까지 다 네 마음대로 정해놔야 마음 편했던 사람. 과거의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상처라고 단정 지었던 많은 말들은 누군가의 조언이자, 배려, 위로이자 공감, 주저함이자 망설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나에게 부탁하고 싶다. 완전하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그저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 또다시 ‘발신인 없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란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어서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될 일에 마음 다치는 일은 또 생기고 말 것이다. 노력으로 안 되는 마음은 별수 없다. 잘 다독여주고 내 말을 들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뿐. 그러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 마음 또한 내 마음먹기에 따라 상처받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너무 다그치지 말자. 적어도 나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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