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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Dec 14. 2020

나의 노트북에게.

나의 모든 부는 네 노동력의 대가.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선배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녀석입니다. 얼굴 뵙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주인님의 특성상 저희 둘이 동시간에 활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거잖아요. 기약 없이 그날을 기다릴 수는 없어서 주인님께 부탁드렸어요. 이 편지를 선배님의 바탕화면으로 옮겨달라고.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무려 10년 동안이나 함께 하셨다면서요? 아무리 저희의 능력이 매일매일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추세라지만 저를 비롯한 요즘 애들도 그 세월은 무리잖아요. 5년쯤 되면 다들 시들시들 해져서 휴직에 들어간다던데... 선배님은 무려 10년 전에 솔로로 데뷔하셔서 제가 오기 전까지 혼자서 활동하셨다니! 저는 그저 놀랍습니다. 근데 선배님 그거 아세요? 부모님, 절친들을 제외하고 주인님 곁을 10년 이상 지킨 건 선배님뿐이래요. 앞으로는 제가 그다음을 잇겠죠... 그럴 수... 있을까요? 솔직히 걱정이 커요. 선배님만큼 제가 해낼 수 있을지.


그동안 많이 힘들진 않으셨어요? 주인님 말로는 선배님은 정말 일만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너무 무리가 됐는지 노트북 전용 디톡스(?) 세 번인가 네 번이나 했다던데... 그걸 지켜보면서도 주인님은 선배님 걱정을 크게 하지 못했대요. 그땐 일하면서 지금까지 모아둔 파일들이 날아갈까 봐 노심초사하기 바빴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선배님이 너무 속상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오직 일로 만난 사이. 그것뿐이라서 주인님은 선배님께 좀 미안한가 봐요. 일 끝나면 선배님을 가차 없이 꺼버리고, 나머지 시간 대부분은 핸드폰이랑 보낸 게 말이에요. 그 친구랑은 여행도 여러 번 같이 갔다면서요? 선배님은 베트남, 중국, 대만에만 같이 갔는데, 그것도 출장이어서 일만 하다 귀국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아니, 아무리 일을 핸드폰 그 친구가 따왔다고(?) 해도 그렇지. 일은 선배님이 다하고! 재미(?)는 핸드폰 그 녀석만 봤잖아요. 어머! 제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갑자기 남 일 같지 않아서 말을 좀 과격하게 했네요. 이해해주세요.


주인님은 선배님께 일만 시킨 걸 너무 미안해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어요. 선배님은 말 그대로 피알오, 프로니까. 오히려 일할 수 있음에 뿌듯하셨을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라고요. 혹시 제가 오지랖을 떤 걸까요?


물론 저도 각오는 하고 있어요. 선배님처럼 저 역시 묵묵히 ‘일’ 길을 걷게 되겠죠. 핸드폰 그 친구가 게으름만 피우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걱정은 안 해요. 그래야 자기도 주인님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여행 사진을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추억들로 꽉 차고, 우리는 파일로 가득한 신세네요. 갑자기 갈등 생기네요. 핸드폰과 잘 지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에이. 걱정 안 할래요. 주인님이 알아서 잘 결정해주겠죠. 혹시 그 녀석 때문에 짜증 나는 일 생기면 선배님께 타닥타닥 편지할게요.


선배님도 알고는 계시죠? 말은 안 해도 주인님이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혹시나 선배님이 모를까 봐. 제가 선배님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하니까, 내심 슬쩍 전해주길 바라는 눈치더라고요. 아무리 선배님에 비하면 미천한 경력의 저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요. 하하! 그대로 전달해드릴게요.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크게 아픈 적 없이 잘 견뎌준 것에 고마워. 잘 알고 있어. 나의 모든 부는 네 노동력의 대가라는 걸.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라고 하셨어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덕분에 저를 데려올 수도 있었던 거라고. 저보고 그 사실을 잊지 말래요.


선배님, 갑자기 제가 서 많이 놀라셨죠.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선배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뿐. 선배님의 커리어는 영원할 거예요. 2011년 1월부터 오늘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히 선배님만의 시간을 보내세요. 저도 열심히 일해서 선배님처럼 명예롭게 은퇴할게요. 곁에서 지켜봐 주세요.


2020년 12월 선배님의 후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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