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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an 11. 2021

세탁기가 얼었는데, 엄마가 고장 났다.

- 미안한데 **서비스 센터에 전화 좀 해줘     


엄마 목소리는 굉장히 풀이 죽어있었다. 엄마와 나의 전화 원칙상(!) 주 5일, 평일이 아니면 웬만해서 통화하지 않는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 왜 무슨 일인데?

- 세탁기가 되다가, 오늘 갑자기 배수가 안 돼!


비교적 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은 대구에 사는 엄마가 아파트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수십 년 넘게 세탁기를 써왔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요 며칠 찾아온 한파로 세탁기 배수관이 언 모양이었다. 급수가 문제없이 되니까, 세탁기를 돌려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이미 30분 넘게 서비스 센터 대표 번호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안내 메시지가 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냥 전화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일단 알았다고 하고서 내가 전화를 했다.   

   

상당히 경쾌한 연결음이 나오고 시작되는 안내 멘트. 원래 이랬나? 분명 처음 해보는 전화는 아닌데 뭔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이겠지?     


- (기계음) 문의하실 제품을

    휴대폰, TV처럼 말씀해주세요     


응? 말하라고? 번호 누르는 거 아니었어? 원래 이랬나? 다소 어색하지만 또박또박 ‘세탁기’라고 외쳤다(!). 잠시 후 바로 상담원이 연결됐다.      


- 엄마, 내가 통화했는데...

    지금 세탁기가 언 것 때문에  문의 전화가 폭주한대.

-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더라니까(시무룩)

- 그리고 엄마, 나도 잘 몰랐는데 찾아보니까

   아파트에서는 한파에 세탁기 돌리면 안 된대

- 그래? 몰랐다... 몰랐으니까 돌렸지(또 시무룩)     


상담원이 안내해준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배수관 쪽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거나, 드라이기로 얼음을 녹여주라는 것. 그게 여의치 않으면 세탁기 안에 뜨거운 물을 붓고 한두 시간쯤 기다렸다가 탈수를 하라는 것. 물론 기사님이 방문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3만 8천 원의 출장비가 발생한다고 했다. 두 가지 다 해봐도 별 차도가 없자, 엄마는 기사님 방문을 예약해달라고 했다. 서비스 센터에 다시 전화했다.      


처음에 연결된 게 운이 좋았던 건지. 웬걸! 시즌(?)이 시즌인지라 도무지 상담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엄마가 30분 넘게 기다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서야 이해됐다. 거기다 상담원 연결을 위해 말해야 하는 것도, 누르라는 건 왜 그렇게 많은(!) 것 같은지. 인내심을 갖고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시스템 상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전화가 끊겨버렸다. 다시 ‘처음부터’를 5번을 넘게 반복했음에도 연결 실패. 결국 인터넷으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화 상담 예약을 신청하고 내 선에서 ‘대충’ 마무리 지었다. 그나마 인터넷을 전혀 하지 못하는 엄마가 아닌 나여서 가능한 엔딩이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풀이 죽은 목소리였던 건 세탁기가 말썽을 부려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부탁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단순한(!) 일도 혼자서 해내지 못한 엄마 자신에게 ‘또’ 실망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엄마 핸드폰의 명의 변경을 위해 급하게 가족 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다. 다행히 근처 병원에서 민원 발급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발급 서비스 선택. 원하는 증명서 선택. 주민번호 입력까지는 무사히 마쳤는데 지문 인식이 문제였다. 제대로 엄지손가락을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기계는 영 인식하지 못했다. 세 번을 실패하고 나서야 알았다. 알려준 위치보다 손가락을 훨씬 더 위에, 그러니까 밖으로 빠져나오겠다 싶을 만큼 애매한(?) 위치에 놓아야 지문을 인식했다. 나의 시행착오를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말했다.     


- 아이고, 그래도 네 덕분에 이렇게 하지.

   엄마 혼자였으면 이거 하지도 못했겠다.

   딸이 있으니까 좋네!     


엄마 혼자서도 문제없이 해왔던 일. 내가 대신 해주 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칭찬을 들었는데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서로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각자 입맛대로 메뉴를 조합할 수 있는 유명 샌드위치 매장을 지나게 됐다.     


- 근데 여기는 엄청 맛있나 봐.

   오며 가며 보면 젊은 사람들이 맨날 줄 서서

   사 먹더라고

- 아! 그런가 보더라. 근데 엄마, 나는 안 가.

  주문하는 게 너무 어려워서(!) 못 사 먹겠더라고     


엄마는 너도 그런 곳이 있냐며 웃었다. 젊은 나도 그러니까, 엄마가 자신한테 실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세상이 빠른 거지, 엄마가 느리기만 한 것도, 바보라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니까.      



얼마 전 한 글을 읽었다. 26살에 처음으로 혼자 카페를 갔는데,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방법을 몰라 헤맸다는 주인공. 그걸 지켜보던 뒷사람이 짜증을 내는 것을 보고 창피해서 후다닥 도망치듯 카페를 나와버렸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서 주문이 생소해서 특정 샌드위치 매장에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 내가 보였다.


모르거나 익숙하지 않은 게 잘못은 아닌데... 죄인처럼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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