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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19. 2021

당신의 마음이 내 입술을 간지럽힐 때.

조언의 방식.

         화장을 아예 안 하면 안 했지, 했다 하면 무조건! ‘풀메(이크업)’여야 한다. 그런데 ‘풀메'라는 말과는 달리 유일하게 등한시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립스틱!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어쩌면 립은 화장의 포인트이자, 꽃이기도 한데 말이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는 요즘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처음 화장을 하기 시작한 스무 살 때부터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래 왔다. 굳이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무쌍’인 나는 '눈 화장'에 집중했다. 입술보다는 그쪽이 조금 더 드라마틱한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고, 립스틱은 너무 잘 지워졌기 때문에 어차피 지워질 거 공들여서 바르고 또 바르는 수정 화장이 무척 귀찮았다.          

 

        특히 겨울철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더 극에 달했다. 심지어 아예 립스틱은 안 바르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계절과는 다른 이유였다. 건조함 때문에 입술 각질의 자기주장은 특히나 유별났다. 난 그들을 관리하는 대신 방관을 택했다. 거울을 보더라도 나는 눈만 봤기 때문에 입술에는 신경을 끌 수 있었다. 그런 무례한(!) 입술에 립스틱은 사치. 그랬던 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요즘에는 굳이 립스틱을 바른다. 더 이상 내 입술이 무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전 언젠가 크리스마스이브, 아니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방송 아카데미 시절부터 작가가 된 이후로도 절친이 된 메이 언니, 뽈 언니, 화 그리고 나. 우리는 되도록 그래 왔듯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도 뭉쳤다. 그런데 그날은 메이 언니가 예정에도 없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왔다. 우리 세 사람을 위한 선물은 앙증맞은 사이즈의 각기 다른 명품 쇼핑백에 담겨 있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들의 눈은 잠시 휘둥그레 해졌다.            

- 야야! 그런 거(!) 아니야. 포장만이야,

  괜한 기대 하지 마!          


        언니의 당부는 아무 소용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에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명품일 거란 기대는 아니었다. 언니 혼자 준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에 설렘이 마구 폭발했다. 어찌나 좋았던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민망함도 충분히 감추고도 남을 정도였다. 내 선물은 디올 백에 담겨 있었다.           


- 엇! 안 그래도 나 이거 써볼까 생각했는데...!

  너무 고마워.          


        괜히 하는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메이 언니가 내 몫으로 준비한 것은 당시에 인기를 끌던 한 브랜드의 립밤이었다. ‘이참에 나도 한 번 입술 관리해 볼까...’ 생각은 했지만 실제 구매로까지 가지는 못했다. 또 몇 번 쓰다가 말 내가 될 것이 뻔했고, 매년 그랬듯 겨울은 또 금세 지나갈 테니까.     

 

        모태 귀차니즘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정말 열심히 립밤을 발랐다. 그리고 그 겨울 끝자락 즈음에 메이 언니가 선물에 숨겨둔 마음을 알게 됐다.


- 언니, 역시 인기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나 봐.

   나 입술 되게 촉촉하지?

- 오! 정말이네. 이제야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단지 인기가 있어서 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겨울을 함께 보낸 것도 이미 여러 해. 그 시간 동안 메이 언니는 내가 시선을 주지 않았던 내 입술에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내 눈에는 안 보이니까 몰랐던 거지. 아니다, 솔직해지자. 봐도 대충 뜯거나 철저히 무신경했다. 문자 그대로 ‘아이 돈 케어’.    

 

        자기 입술도 아니고 내 입술에 흡족해하는 언니를 보면서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흘렀다. 그전에도 언니가 내 입술에 충고를 해 준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헤매는 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흘려들어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메이 언니라면 나를 배려해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나는 때로 받은 말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기도 했다. 고마움보다 미안함이 큰 걸 보니, 아마도 내가 또 잃어버렸던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했던 것이 오롯이 내가 ‘입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건 내 마음이니까.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주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간, 침묵, 말, 문자, 편지, 그리고 선물 등등. 나는 언니가 선물로 조언을 해준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상대의 눈(화장)을 먼저 보듯이 또 누군가는 입술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 입술이 나의 전부가 될 때도 있었을 터. 언니는 완벽한(!) 눈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입술이 안타까웠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립밤’을 선물한 의미를 전적으로 나 혼자 해석했고, 언니의 마음을 다시 묻지 않았으므로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착각이던, 아니던 내 입술은 아기였던 시절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이후 입술은 계절 관계없이 촉촉하다.     

       

        보는 순간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있다. 많이 고마웠던 건, 선물이 아니라 그 찰나의 순간, 나를 떠올려준 마음. 다행히 그날은 종종 분실하곤 했던 나를 향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기억에 담았다. 그래서 지금도 립스틱이나 립밤을 바를 때면 그 마음이 입술을 간지럽힐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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