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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pr 16. 2021

러브콜을 보내는 최적의 타이밍은 언제일까.

    나를 믿고 앞으로 진행사항을 계속 보고하겠다는 그는 내가 예상한 대로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실망하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나에게 전달할 사항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애초에 예감했었으니까.

     

    불운한 예감은 전날 밤에 그가 보낸 문자가 시작이었다. ‘작가님 요즘 바쁘신가요?’라는 한 줄에 담긴 그의 의중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한 마지막 연락으로부터 4달이 넘어 물어온 안부(!). 그만큼 우리는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물며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한 번도 없는, 단지 일 적으로만 연락하는 사이였다. 아마도 그가 내게 부탁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문자를 보내온 시간이 밤 9시여서 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밤에도 연락하는 일은 서로가 원하지는 않지만 있을 수 있고 슬프게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최초의 제안인 ‘러브콜’은 좀 다르다. 내 경험상 구태여 밤에 러브콜을 보내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다. 누군가의 ‘땜빵’이거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을 조건일 가능성이 높은 일. (결론적으로 그는 이 두 가지 경우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한 시간은 최초 도착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은 밤 10시. 나는 내일로 대답을 미뤘다. 일부러 그의 애간장을 태울 생각은 아니었다. 만약 촉각을 다투는 일이었다면 전화를 했겠지 싶었다. 또 그가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를 듣고자 했던 나의 대답은 ‘뭐 늘 그렇죠.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정도. 그를 추진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의 성격상 바로 다시 전화해올 것이 뻔했다.


    그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통화는 최소 10분 이상. 그깟 10분이 뭐가 길까 싶겠지만 그 10분 중에 내가 확인해야 할 내용은 채 2분 남짓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그의 TMI를 들으며 리액션을 해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물론 그가 내 고막을 괴롭히려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는 내 선에서 알 필요 없는 내용까지도 다 공유하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편에 가까웠고, 단지 나는 그게 조금 아니, 많이 피곤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 밤, 그와 통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을 미루는 대신 혹시나 잊을까 내일 아침 11시 ***에게 연락이라는 메모를 해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러브콜이 100% 새드엔딩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8시 59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늦은 새벽까지 마무리할 일이 있었던 나는 미처 핸드폰을 무음으로 하지 못했고, 그 결과 그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역시나 성격 급한 그의 전화였다. 원치 않은 시간에 잠을 깬 것에 순간 욱했지만 얼마나 급한 일이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에 훅하고 터져 나오는 짜증을 애써 가라앉혔다.     


- 작가님!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드렸나요?

마음 같아서는 ‘그걸 아신다면 조금 이따 전화하지 그러셨어요’하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친절함이 넘치는 그의 목소리에 진심 아닌 말이 잠을 가득 붙이고 작은 예의를 갖춰 튀어나왔다.

- 아... 아니에요...

- 어제 제가 문자 드렸었는데...

이번에는 읽씹 한 거냐고 원망하는 느낌의 목소리가 아주 약간 섞여 있었다.

- 그게 제가 늦게 봤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오늘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 아 그러셨구나. 다른 게 아니고 작가님...          


    11분 31초의 통화에서 내가 찾아낸 팩트는 선배가 그에게 일을 맡길 것 같다. 아니다. ‘맡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는 것. 그럴 경우에 이 프로젝트를 맡아줄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 사람이 나였으면 한다는 것. 그 나머지는 역시나 내가 알 필요 없는 TMI였다.  한 마디로 있을 지도, 없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비한  컨디션 체크 전화였다. 


    그가 하기로 결정된 일이 아니니 당연히 프로젝트의 규모도, 콘셉트도, 일정도, 하다못해 나에게 제시할 최소한의 원고료조차도, 그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그럴 것 같다’는 투로 기대에 차서 말했지만 내 귀에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오직 그의 희망 사항만 담긴 공허한 말로 들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여느 선배가 어쩌다 한 번쯤 후배들에게 하는 달콤한 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을 그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작가님이 팀을 꾸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하시겠어요?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가 따내게 된다면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노라 대답했다.      

- 작가님 고마워요. 아니, 어제 아는 피디에게 같이하자고 연락했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5월에도 바쁘고, 6월에도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적어도 프리랜서 피디라면 내가 아는 한 저렇게 답할 리 없었다. 혹시 모를 여지를 남겨두는 게 이쪽 생리. 어떤 가능성도 닫고 말했다면 일의 질이나 일정 또는 페이 문제가 아닌 그와 함께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한 제안은 나에게도 이번이 세 번째. 그중 소위 말해 메이드 된 것은 없었다. 에둘러 거절한 피디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그에게 그동안 몇 번이나 러브콜을 보냈고, 그중 성사율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단계에서 대체로 몇 시에 연락했는지 궁금했지만 솔직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러브콜 또한 메이드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설령 모두가 탐내는 조건의 러브콜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순간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예의까지 갈 것도 없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러브콜은 오히려 마음만 상할 뿐이다. 선배에게 자신은 이미 제작팀이 꾸려져 있다고 어필하고 싶었던 욕심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욕심일 뿐.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일을 두고, 굳이 밤 9시에 물어볼 것도, 아침 9시에 연락할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그가 받은(?) 러브콜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연락한 것은 그로부터 5일 후였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 번째 사과를 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좋은 마음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없던 일이 된 것에 대한 사과를 그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받아두었다. 그의 조급함으로 방해받은 나의 밤과 아침에 대한 보상이었다.  

 

- 작가님 다음에는 진짜! 제가 확실하면 전화할게요!     


    부디 다음에는 그의 러브콜을 짜증이 아닌 반가움 내지는 고마움만으로 맞을 수 있기를 바면서 나는 한 번쯤은 더, 그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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