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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Apr 30. 2021

모르고 살아도 괜찮지만 알고 살아도 좋을 것들.

e북 리더기 지름에 대한 변명.


    책을 소장하는 것은 내 규칙 중 하나였다. '책 읽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지적 허영심’이 충만했던 시절에 생긴 소확행적 사치이자 습관적 소비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읽은 책 보다 단순히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SNS용 책이 많았다. 책장에 한 권씩, 두 권씩 늘어가는 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책 속의 세계가 모두 내 머리에 옮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딱 좋았다. 정작 그중에 다 읽은 책은 손에, 그것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면서.      


    분명 시작은 읽기 위함이 아니었다. 딱히 내세울 게 없었던 나를 위해 그럴듯한 이미지가 필요했을 뿐. ‘책 읽는 사람’은 1만 원 전후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이미지였다. <책을 버릴 수 없는 이유.> 中     


    언젠가 밝힌 적도 있듯이 책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다. ‘책 사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딱히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아도 되고, 그다지 돈이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여러모로 그 시절 나에게 적당한 사이즈(?)의 취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1N 년이 지난 최근, 나의 취미 생활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돈은 그때의 나보다 많고, 책 읽는 것 또한 그때의 나보다 훨씬 사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나의 책 사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 공간의 크기. 400권이 넘어가자 책을 둘 공간을 아무리 재고, 또 재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굳이 구겨 넣으면 넣을 수도 있으나 나도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의 미학을 가진 사람. 내 공간이 지저분해지면서까지 욕심내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 상태에서 책을 계속 가지려면 책 보다 먼저 집을 사야 했다. 그 시절의 나나, 지금의 나나 그건 꿈도 꿀 수 없는 일.      


    가끔이던 동네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성적 귀차니즘의 소유자기 때문에 버스로 왕복 20분 걸리는 도서관을 직접 찾기보다는 대출 신청한 책을 지정한 지하철역으로 갖다 주는 ‘U 도서관’을 이용했다. 세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만족도가 높은 서비스였다. 다만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는 탓에 나조차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없는 욕망이 2주 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대로 읽어서 생각을 멈추게 해야 하는데, 내 기준 그것은 책만이 할 수 있었다. 활자에 무아지경으로 끌려다니기 위해서는 읽지 않은 책이어야 했으므로 내가 소장한 책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당장 책을 읽고 싶은데 기다려야 하는 그 틈은 지루하기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거기다 누군가의 반납 연장은 최후의 한 방이 되었다.    

  

    뭐, 지금까지 e북 리더기 지름에 대한 나름의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e북 리더기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고로 책은 손으로 촉감을 느끼면서 읽어야 제대로 된(!) 독서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한 쇼핑이었다. 뭐에 홀린 듯이 결제하고 나서 뒤늦게 충동구매라는 가책이 느껴졌다. 그러면 결제 취소를 하면 될 것을... 한 달에 한 권씩 1년만 읽어도 장비값(!)은 대충 나오는 거니까, 라며 나를 달랬다. 그때의 나에게 정말 책이 필요했던 건지, 단지 지름신이 왔던 건지에 대한 대답은 2주 후에 돌아왔다.     


    e북 리더기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것도 무려 2주 동안 14권이나. 평균적으로는 하루 한 권씩 말 그대로 읽어치운 셈인데, 그 덕에 3월까지 16권이던 올해 독서량이 e북 리더기를 산 4월에 총 30권이 됐다. 물론 가게도 오픈 발이 있듯이, 새 장비 발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럼에도 e북 리더기 구매는 잘한 일로 꼽고 싶다. 독서량이 늘어난 것에 비해 내 공간이 전혀 감내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전혀 도전하지 않은 작가의 책이나, 장르도 읽게 됐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


    독서라는 것이 적지 않은 시간뿐 아니라 돈도 들어가는 일인 만큼 ‘아깝다’는 마음이 들면 곤란하다. 그나마 시간은 읽는 것을 중단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손해를 덜어낼 수 있지만 돈은 다시 중고책 시장에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가치 하락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책을 살 때는, 아무리 다양한 장르와 작가의 책을 읽고 싶어도 결국은 안전빵(!)을 택하게 된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특히나 책은 취향이라는 것이 가장 모나게 활동하는 분야 중 하나. 확신은 없지만 한 번쯤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 정도로는 독서로도, 구입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나마 덜 아까울 작가나, 재미를 보장하는 장르 거나, 믿을만한 출판사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세상에 아무리 수만 가지 책이 나와도 나의 세계가 쉽사리 넓혀지지 않았던 이유기도 하다.      


    요즘 나는 모르고 살았어도 되지만 알고 나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을 살고 있다. 혹여나 넷플릭스 메인 화면만 이리저리 클릭하다가 끝내 마음 정하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e북 리더기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웬걸! 시간도, 장소도, 돈도 그리고 취향까지도 극복하게 만드는 e북 리더기 때문에 꽉 닫혀있던 세계가 열리고 있다. 틈만 나면 그 세계에 풍덩 빠져 5분이든 10분이든, 여행하는 중이다. 들인 돈이나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기는커녕 신나기만 하다.


    나는 만나던 사람을, 듣던 노래를, 가던 곳과 먹던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 취향 되었다. 오랫동안 무색무취였던 내가 나만의 색깔이 생겼다는 점에서 취향을 가지게 된 건 좋았다. 하지만 취향에 의리를 지키는 동안 좋아하는 마음은 ‘고집’이 되기도 했고, 고집이 오기까지 부리면 ‘규칙’마저 될 때도 있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 마음이 방황하지 않는 대신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이제껏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가는 재미를 느꼈다면 지금부터는 하나씩 규칙을 깨뜨리는 재미를 알아가 보려 한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고 살지만 알고 나면 좋은 것들이 얼마나 더 많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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