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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y 07. 2021

프리지어 꽃말이 꼭 나 같다고 했다.

        꽃을 선물 받았다. 노란색 프리지어였다. 그때 내 기분이 꽃잎처럼 확 피어났던 건, 오랜만에 받은 꽃 이어 서일 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이었기 때문일 수도, 그날이 내 생일이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꽃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뽈 언니’여서 그랬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니를 1N 년을 넘게 보아왔기에 잘 안다고 여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잘 몰랐다. 몰랐던 언니를 만날 때면 나는 매번 ‘아차’ 했다. 때로는 미안함이었고, 때로는 고마움이었다.


        그날 언니에게 꽃을 받았을 때, 나는 또 한 번 ‘아차’ 싶었다. 내가 본 언니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동안 언니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받았으면서도 한 번도 ‘꽃’을 기대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꽃 선물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건, 그녀라서가 아닌 것 같다. 그저 내가 꽃을 그렇게 분류했다. 실용적이지 않다고. 어쩌면 언니는 내가 아는(!) 실용주의자가 아니었던 걸까. 단지 꽃이 예외인 걸까. 언니의 대답이 무엇일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냥 언니에게 내가, ‘예외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꽃을 받은 그 순간 미안함도, 고마움도 아닌 감동을 받았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언니는 나를 잘 아는 편이었다. 언니는 프리지어 꽃말이 꼭 나 같다고 했다.      


- 천진난만. 자기 자랑. 순진함 그리고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래.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건 기억 안 난다고도 덧붙였다. 찾아보니 ‘청순함’이었다. 기억이 안 날만 했다. 꽃말에 언급된 이미지 중에서 나는 청순함과 가장 거리가 멀었다. 처음부터 꽃말 때문에 노란색 프리지어를 사기로 결심한 건지, 사고 보니 꽃말이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말을 해줬는데 그때 나는 정신을 약간 빼앗겼던 것 같다. 이런 걸 ‘칵테일파티 효과’라고 하던가? 시끄러운 파티장의 소음 속에서도 나에게 의미 있는 정보에 집중하는 현상. 직역하면 딱(!) 들어맞다. 그날 나는 ‘베프’ 뽈 언니를 비롯한 화, 메이 언니와 조촐한 생일 파티 중이었는데, 잠시 혼자 꽃말에 빠져있었으니까. 조금 전까지 내가 꽃을 실용적이냐, 아니냐  분류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꽃이  꽃말로 나라는 사람을 분류했다. 언니 말처럼  나 같았다. 꽃말에 심취한 나머지 급기야 나는 김춘수 시인이 되어 <꽃>을 오마주 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나에게 꽃말을 알려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프리지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꽃말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만의 꽃이 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보아왔던 꽃이지만 ‘나의 맞춤 꽃’이라고 생각하니 새로웠다. 특히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언니가 보기에는 내 모습이 그렇지 않았던지 꽃말 하나를 정정했다.     


- 자기 자랑 대신에 ‘자기애’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자기 자랑이 적지 않은 것도, 자기애가 넘치는 것도, 모두 나다. 언니는 내가 ‘자기 자랑’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설령 대놓고 하는 자기 자랑일지라도 ‘잘난 척’이 아니라 ‘자기애’로 봐주는 사람들이 그녀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굳이 언니가 그 말을 고치지 않았어도 나는 괜찮았다. 그녀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잠시 멈칫했을 때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나를 찌르는 칼’은 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들도 내게 ‘예외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며칠 후 저녁 밤 8시 30분. ‘도와주세요’라고 문자가 왔다. 위험 상황일 때 특정 버튼을 누르면 지정해 놓은 사람들에게 현재 위치와 짧은 음성을 보내주는 SOS 기능이었다. 긴급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뽈 언니였다. 언니에게 긴급 호출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다섯 번은 되는 것 같은데, 구형 핸드폰의 작동 오류로 생기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문자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결론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니겠지 하다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때마다 전화를 했고, 언니의 별일 없음을 확인했다. 그나마 신형 기종으로 바꾸고 나서는 없던 일이었다. SOS 신호를 보낸 위치는 언니 집이었다. 여러 번 있었던 일. 이번에는 전화 대신 문자를 보냈다.

     

- 아니, 또 왜 이래?

- 진짜야?

- 이거 언니 집 아니야?     


        이번에도 실수라면 재빨리 와야 할 답이 없다. 문자를 확인했다는 숫자 1도 없어지지 않는다. 걱정이 안일하려는 마음을 일순간 습격했다. 얼마 전 세 모녀의 목숨을 앗아간 ‘김태현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헉! 집안으로 괴한이 침입했나? 만약에... 만약에...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응. 무슨 일이야?     


너무나 해맑은 목소리. 정작 본인은 긴급 메시지가 보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또, 또! 나만 SOS 메시지에 진심이었지...’ 언니는 그런 실수조차도 속 좁은 나를 너그럽게 만드는 '예외인 사람'. 아무 일 없으니 됐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우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는 실용주의자가 분명하다. 지극히 본인은 기계치이면서도 핸드폰의 유용한 기능은 어떻게든(!) 써먹는 실용주의자. 그러니 언니에게는 꽃이 아니라 내가 예외라고 계속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언니 반박은 안 받을게.)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정확하게 그 사람일 때도 있고, 전혀 몰랐던 사람일 때도 있다. 따지고 보면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욕심. 우리는 그저,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는, 내가 아는 당신도, 몰랐던 당신도 지금처럼 계속 발견하고 싶다. 그리고 그대들도 찾아줬으면 좋겠다.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나를 말이다.  


'보고 싶은 사람'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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