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에 찬 그의 각오.

다섯 번째 전화

by 현진

앞으로의 진행상황을 계속 보고하겠다는 그는 내가 예상한 대로 며칠째 연락이 없었어. 솔직히 실망하지도, 서운한 마음도 들지 않았어. 그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겠지만 그가, 나에게 전달할 사항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란 걸 어렴풋이 예감했거든.


불운한 느낌은 전날 밤에 그가 보낸 문자가 시작이었어.


- 작가님 바쁘신가요?


한 줄에 담긴 그의 의중을 알아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우리는 철저하게 일로만 만난 사이. 사적으로 연락하는 일은 없었고 그마저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 그러므로 바쁘냐의 의미가 단순 안부일 리는 없었어. 아마도 내게 부탁할 일이 생긴 것 같더라.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문자를 보내온 시간이 밤 9시라는 거야.


현재 진행 중인 일 때문에 밤에 연락하는 일은 전화를 걸어야 하는 쪽이든, 받아야 하는 쪽이든 한숨부터 나오는 일이지만 꽤 자주 생기잖아. 하지만 최초의 제안인 ‘러브콜’은 대부분 나인 투 식스, 일과 중에 연락한단 말이야. 구태여 밤에 러브콜을 하는 경우는 내 경험상 크게 세 가지였는데, 누군가의 ‘땜빵’이거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을 조건의 일이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투입되어야 할 엄청나게 촉박한 일이거나. 마지막이 가장 최악인데, 그냥 마음만 급해서 해보는 연락. 과연 그의 러브콜은 어디에 속하는 일이었을까.


그의 메시지를 확인한 시간은 밤 10시. 대답을 내일로 미뤘어. 이러저러한 그의 사정을 예상하면서도 일부러 그의 애간장을 태울 생각은 네버! 네버 아니었어. 정말 촉각을 다투는 일이었다면 문자보다는 전화를 했을 것 같았고, 한 시간 내에 한두 번은 더 전화했을 것 같았거든. 무엇보다 내가 대답한 이후의 상황이 나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웠어. 그를 추진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내가 아는 그가 맞다면 나의 답장에 곧바로 전화해 올 것이 뻔했거든.


알아, 그게 왜라고 묻고 싶은 거지? 문제는 그가 간단히 용건만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야. 통화는 아주 짧아도 10분 이상, 평균 20분이 될 것이었고 그중에 나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는 채 5분 남짓이나 될까... 나머지 시간은 그가 토해내는 TMI를 들으며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 게 또 다른 내 몫의 일이야. 물론 그가 내 고막을 괴롭히려고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지. 단지 그라는 사람은 내 선에서 굳이 알 필요 없는 내용까지도 다 공유하는, 친절해도 너무 친절한 편에 가까웠고, 그에 비해 나는 그런 행위들을 많이 피곤해하는 부류의 사람이라서 그 밤, 그와 통화하고 싶지는 않았어.


대답을 미루는 대신 혹시나 잊을까, ‘내일 아침 10시 ***에게 연락’이라는 알람을 설정해 뒀어. 이때까지만 해도 이 러브콜이 100% 새드엔딩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다음날, 아침 8시 59분. 전화벨이 울렸어. 늦은 새벽까지 마무리할 대본이 있었던 나는 미처 핸드폰을 무음으로 하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고, 그의 전화에 깨고 말았지. 원치 않은 시간에 잠을 깬 것에 순간 욱했지만 얼마나 급한 일이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에 훅하고 터져 나오는 짜증을 애써 가라앉히고 전화를 바로 받았어.

- 작가님!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를 드렸나요?


마음 같아서는 ‘그걸 아신다면 조금 이따 전화하지 그러셨어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친절함이 넘치는 그의 목소리에 진심 아닌 말이 잠을 가득 붙이고 작은 예의를 갖춰 튀어오더라.


- 아... 아니에요...

- 어제 제가 문자 드렸었는데...


친절함 사이로 읽씹 한 거냐는, 원망 담긴 그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자극했어.

- 그게... 제가 너무 늦게 봐서,

안 그래도 조금 이따 연락드리려고 했어요.

- 아 그러셨구나. 다른 게 아니고 작가님...


20분 31초의 통화에서 내가 찾아낸 팩트는 선배가 그에게 일을 맡길 것 같다, 가 아니라 ‘맡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는 것. 그럴 경우에 이 프로젝트를 맡아줄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 사람이 나였으면 한다는 것. 그 나머지는 역시나 내가 알 필요 없는 TMI. 한 마디로 있을 지도, 없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비한 내 컨디션 확인 전화였어. 그래... 내가 떠올린 가장 최악의 경우에 속하는 연락이었지. 그저 마음만 급해서 일단 던져보는 러브콜.


그가 하기로 결정된 일이 아니니 당연히 프로젝트의 규모도, 콘셉트도, 일정도, 하다못해 나에게 제시할 최소한의 원고료조차도, 그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어. 그는 겉으로는 ‘그럴 것 같다’는 투로 기대에 차서 말했지만 내 귀에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오직 그의 희망 사항만 담긴 공허한 말로 들렸어. 아무래도 여느 선배가 어쩌다 한 번쯤 후배들에게 하는 달콤한 말에 불과할 수도 있는 제안을 그가 지나치게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 같더라.


- 작가님이 팀을 꾸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하시겠어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가 그 프로젝트를 따내게 된다면 가능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어.


- 작가님 고마워요. 아니, 어제 아는 후배 피디에게

같이하자고 연락했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이번 달에도 바쁘고,

다음 달에도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흠... 적어도 내가 아는 한‘프리랜서’ 피디라면 저렇게 답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혹시 모를 여지를 남겨두는 게 이쪽 생리거든. 그래서 그가 말한 후배 피디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겠더라. 어떤 가능성도 닫고 말했다면 일의 질이나 일정 또는 페이 문제가 아닌 그와 함께 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을 거라고.

나에게도 이번이 세 번째 제안. 그중에서 소위 말해 메이드 된 것은 없었어. 에둘러 거절한 피디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그에게 묻고 싶었지. 그동안 몇 번이나 러브콜을 보냈고, 그중 성사율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단계에서 ‘몇 시에 제안했는지’ 말이야. 솔직히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어. 그리고 나에게 늦은 저녁과 이른 아침에 보낸 이 러브콜 또한 메이드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그 순간 강하게 들었지.

아무리 모두가 탐내는 조건의 러브콜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순간 환영받는 것은 아니야. 예의까지 갈 것도 없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러브콜은 오히려 마음만 상할 뿐이지. 이번처럼. 선배에게 자신은 이미 준비된 작가팀이 있다고 어필하고 싶었던 욕심이야 백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욕심일 뿐.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는 일을 두고, 굳이 밤 9시에 물어볼 것도, 아침 9시에 연락할 것도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거기서부터 그가 받은(?) 러브콜의 결말도 내게 보낸 러브콜의 결말도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그가 다시 연락한 것은 그로부터 5일 후. 내 예상대로 그 프로젝트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어. 그는 나에게 세 번째 사과를 했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좋은 마음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 그러므로 없던 일이 된 것에 대한 사과를 그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받았어. 그의 조급함으로 방해받은 나의 밤과 아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더라고.


- 작가님 다음에는 진짜! 제가 확실하면 전화할게요!


부디 다음에는 그의 러브콜을 짜증이 아닌 반가움 내지는 고마움만으로 맞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한 번쯤은 더, 그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어. 그리고 그 기대는 내 기억 저편에 지금도 걸려있는 상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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