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아. 그런 점에서 이날은 참 이상한 게 아니라 요상한(?) 날이었어. 어땠냐면 말이야.
이른 아침,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무시하고 다시 잠을 자려다가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스르륵 스팸 차단 어플이 알려주는 정체로 향하더라고. 발신인은 ‘**구 보건소’였어. 응? 보건소? 다시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검사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보건소에서 연락해 올 일은 없었어. 그렇다고 쌩~ 무시하자니, 국가 기관에서 굳이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 귀찮은 마음을 단숨에 무르고 받았지.
- 여보세요?
- **보건소입니다.
- 아... 네!
- 이번에 건강 검진 대상이신데 아직 안 받으셔서,
꼭 건강검진받으시라고 연락드렸습니다.
솔직히 나 말이야, 보건소가 내 건강검진여부까지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감격했잖아. 나 이런 구속적인 거 되게 싫어하는 사람인데, 심경의 변화랄까. 암튼 국가의 보호와 관심이 고팠나 봐. 근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게을러서 계속 미루고 또 미뤄서 안 그래도 힘든 보건소 분들의 업무를 하나 더 늘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무(!)로 바쁘신 분들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얼른 고맙습니다만 하고 끊었어. 그나저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건강검진 언제 가나.... 하아...
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것은 세 시간 후였어. 이번에는 핸드폰 번호. 모르는 번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원칙을 어기고 받는 전화가 핸드폰으로 걸려오는 전화야. 물론 한 번에 받는 법은 잘 없지. 잘못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자체 분류하고 안 받는 게 대부분이야. 정말 나를 찾는 전화가 맞다면 곧 다시 전화가 걸려오거나 문자가 오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원래 루틴대로 그냥 핸드폰을 엎었지. 그러다 왠지 받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몰려오더라고.
- 우체국 택배기사인데요~
택배? 요즘은 다시 긴축재정 시즌이라 내가 주문한 건 없었어. ‘받을 택배가 없는데 무슨 택배지?’ 하다가 어젯밤 아빠가 전화한 게 생각난 거야. 엄마가 새 김치를 담갔다고, 나도 먹어봐야 한다며 김치랑 수육을 택배로 부쳤다고 했었거든. 나는 잘 익은 김치보다 금방 만든 김치를 좋아해. 굳이 나누자면 ‘겉절이 파’랄까. 하지만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통 먹어보기 힘들었어. 혹시라도 엄마만 번거롭게 만드는 일이 될까 봐 새 김치를 먹고 싶다는 말도 꺼내질 않았지. 그러다가 몇 년 전에야 불쑥 지나가는 말로 금방 만든 김치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해버린 거야. 김치와 수육이 서울집으로 오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였어.
엄마표 김치를 받고 나면 ‘고맙다’와 ‘맛있다’ 사이에서 ‘괜히 말했다’는 말은 줄곧 방황했어. 한때는 엄마가 고생스러우니까 그냥 보내지 말라고도 했어. 그냥 해본 소리라고. 근데 마음을 아니지, 말을 바꿨어. 엄마의 고생을 위하는 ‘하지 마’라는 말보다 엄마로 인해 ‘내가 더 행복해졌다’라고 말하는 게 엄마를 더 기쁘게 해주는 것 같았거든. 그 후로는 '엄마 너무 맛있어. 잘 먹을게. 역시 엄마 김치가 최고야'라고만 했어.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몇 시쯤에 도착할 것 같다는 안내 문자를 받은 게 생각나지 뭐야. 그런데 왜 전화를 하셨을까, 그냥 가져다주시면 될 텐데...
- 주소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
- 주소 가요?
- 네.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아빠의 언질이 없었다면, 또 택배 사전 안내 문자가 없었다면 충분히 의심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어. 왜냐하면 내가 사는 곳은 10여 년 동안 바뀐 적이 없었고, 아빠가 택배를 부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주소가 틀릴 리가 없었어. 약간 의심은 됐지만 그가 불러주는 주소가 대체적으로 우리 집 주소와 동일하더라고. 번지만 제외하고는 말이야. 아빠에게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번지를 정정해 기사님께 주소를 불러드렸어.
- 아! 번지만 잘못 적으셨네요.
****-*인데 ***-**으로 되어 있네요.
말씀하신 곳으로 갖다 드릴게요. 집에 계시나요?
- 아니요 집에 없어요.
- 그럼 문 앞에 두겠습니다.
- 네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안도감이 찾아왔어. 원래대로 전화를 끝까지 안 받았으면 택배 기사님이나 엄마의 김치가 갈 곳을 잃고 얼마나 헤매고 다녔겠어. 무엇보다 택배 기사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귀찮은 상황이었음에도 짜증 하나 없이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가져다주고자 애쓰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어.
다시 핸드폰이 울렸어. 이번에는 ‘행복하세요’ 레터링이 뜨는 모르는 번호였어. 하루 동안 벌써 세 번째. 오늘이 뭔가 규칙을 깨는 그런 날인가 싶어 이번에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어.
- 현진 작가님 되세요?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나에게는 번호가 없는 사람일 텐데, 목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더라. 이럴 때가 정말 난감해. 그래도 어쩌겠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 네, 그런데 누구세요?
- 저 ***대표예요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야. 절친들도 함께한 기억이 흐릿할 때면 나에게 확인할 만큼 남들에 비해 유난히 내 기억은 오래갔고, 뚜렷했어. 특히 사람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런 편이야.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다그쳐 봐도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었어. 물론 대충 기억난다고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성격상 몹시 반가워하는 그에 비해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
-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이 잘...
- 아, 그러시구나. 우리 6년 전에...
헐... 6년 전? 내 기억이 아주 흐릴 만도 했지. 그 후로도 계속된 그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어. 하는 수 없이 그가 쏟아내는 여러 말을 퍼즐 삼아 조각들을 이어 붙였지. 그 결과 방송 프로그램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제작사 대표로 좁혀졌어.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결정적인 힌트를 던졌어.
- 그때 우리 *** 기업 홍보 영상 같이 했었잖아요
'그다!' 그가 말한 홍보영상은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기업 것이었고, 내가 그 기업 관련해서 만난 사람은 딱 그, 한 명뿐이었거든. 그리고 6년 만에 다시 그 기업 홍보영상 프로젝트 때문에 다시 내게 전화를 한 거였더라고.
- 아! 생각났어요
내가 마침내 기억을 해내자 그는 완전히 더 신난 목소리였어. 그의 말에 따르면 그 후에 몇 번 더 연락했는데 그때는 내가 다른 일 때문에 일정이 안 맞아서 같이 못 했다고 하더라. 솔직히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대세에 지장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패스해 버렸어. 그리고 확률적으로 나보다는 그의 기억이 맞을 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에 다시 연락했다고 했어.
그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그간 연락 못 한 사정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 6년 만의 전화에서도 거침없이 TMI를 남발하는 그. 결국 그는 6년 전에도 투 머치 토커 재질이었던 것 같다는 내가 완전히 잊고 지낸 느낌까지 되살려버리더라. 아무튼 결론은 길고 긴 6년의 시간을 돌아 우리는 다시 일해 보기로 했어. 이번에는 정말 잘해 보자는 결의에 찬 그의 각오를 듣고 나서야 나는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어.
나는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아. 그런데 오늘 하루 세 번이나 그 규칙을 깼어.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의 김치가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