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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01. 2024

내가 '바구니 부자'가 된 사연.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서_1

         보통 무엇이든 시작이란 걸 할 때 이왕이면 조금은 ‘의미 있는 시작점’을 찾게 된다.

     

        하루 중의 한때라면 ‘정각’이 가장 먼저 스페셜 리스트에 오른다. 일주일의 경우라면 보통은 월요일을, 날짜로 치면 매월 1일을 그 시작점으로 잡는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이런 시작점은 곧바로 미루기 위한 핑곗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왜냐하면 꼭 하고 말일은 그냥 해치우므로 시작점이 필요할 리가 없고, 할 때를 정한다는 것은 굳이 그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미 있는 시작점’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은 ‘시도를 미루기 위한 변명’이 되기 쉬웠다. 그래서 만약 이번 달 1일의 계획을 놓치게 된다면(이라고 쓰고 미룬다고 읽는다) 기회는 10일, 20일로 넘어간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30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다음 달 1일로 떠넘길 가능성이 훨씬 높다.      


        내가 실패했던 시작의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미뤄지기만 하다가 끝내 잊히거나 포기됐다. 반면 성공한 것들은 어느 날 또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지난겨울 생애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샀다. 나에게 크리스마스트리란 내 집에서는 예쁜 쓰레기 조차로도 대우받을 수 없는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에 불과한 것. 그런데 불현듯 크리스마스트리가 하고 싶어졌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나는 쿠팡 와우 회원이니까. 당장 결제만 하면 몇 시간 후에는 도착할 것이었다. 어제 술김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는 고백을 써서 하는 말이지만 이 선택은 결코 주사가 아니었다. 충동구매라면 모를까.     

 

        문제는 내 집이 너무 지저분하고 너저분해서 트리를 둘 공간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는 거였다. 이 집에 산 지 12년. 생각해 보면 이사를 다닌 것이 아니니 옷을 제외하고는 들어온 물건들은 여간하면 버려지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대대적 정리를 하기는 했지만 사들인 것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만약에, 혹시나, 어쩌면’이라는 이름표를 갖다 붙이고 또다시 수납 행. 그런 물건들이 차고 넘쳐 이제는 정해진 공간 밖으로 삐져나와 급기야 물건이 사는 집인지, 내가 사는 집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가 되고 말았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말이다.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면 트리는 온다. 지금이라도 구매취소를 하면 될 텐데 어쩐지 이번에는 포기가 되지 않았다. 트리를 둘 공간을 반드시 마련하겠다는 결심마저도 건너뛰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단언컨대 이번처럼 바로 실행에 옮긴 경우는 없었다.      


        여태까지 대청소를 할 때는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고, 시작에 돌입했다...... 고 하고 싶지만 실은 결국에는 시작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어떤 것은 결심까지가, 또 어떤 것은 준비 과정이 한계였다. 결심은 생각보다 빠르게 식어버리고 그마저도 나름의 의미 있는 시작점을 찾다 보면 으레 이렇게 되고 만다. 오전 10시에 하는 거야. 아니다. 그냥 깔끔하게 점심 먹고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밥을 먹고 나면 몸은 늘어진다. 거짓말이다. 왠지 나른한 거 같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좋다, 그래. 좀 쉬다가 오후 2시에는 꼭 시작하는 거야. 2시가 4시가 되고, 6시가 되면, 청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며 합리화한다. 종일 시작점만 찾다가 내일 하자고 다짐만 또 해버린다. 하지만 오늘 오지 않은 시작 신호가 내일이라고 신나게 도착할 리 없다. 그러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몸은 간신히 움직여졌다.      


        어디 그뿐일까. 기적적으로 잠든 실행력을 깨웠더라도 걸림돌은 또 있었다. 정리라는 걸 하려고 보면 왜 항상 수납공간이 부족한 것 같은지. 무턱대고 수납함, 바구니부터 사고 다. 하지만 막상 보면 너무 수량을 적게 샀거나 많이 샀거나, 크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들이어서 불필요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정리를 하겠다고 벌인 일이 종내에는 또 물건들만 사들여 공간만 부족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 버렸고 나도 누군가처럼 ‘바구니 부자’만 될 뿐이었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수납공간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차고 넘치도록 물건이 너무 많았다. 근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지금껏 고작해야 몇 개를 정리하는 선에서 그쳤던 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놓겠다는 일념 하나로 단번에 물건 정리에 들어갔다.


       크리스마스트리, 이것이 내가 경험한 가장 어처구니없는 '청소의 시작'. 그런데 그것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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