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진 Feb 02. 2024

물건을 갖고 싶은 이유.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서_2

        지금껏 고작해야 몇 개를 정리하는 선에서 그쳤던 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놓겠다는 일념 하나로 단번에 물건 정리에 들어갔다고 했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음의 준비 없이 바로 청소에 돌입했다는 것이지 청소가 한 번에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집이 넓어서가 아니다. 나는 원룸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그만큼 집은 감당 불가의 상태로 어질러져 있었다. 내가 구입한 25cm 사이즈의 트리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하하.      


        절대적으로 대청소가 필요했지만 대청소라는 이름으로는 마무리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왜냐하면 몇 시간 후면 크리스마스트리는 도착하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전에 끝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럴 때면 (믿기 어렵겠지만...) 내가 가진  완벽주의도 임기응변의 달콤한 계획에 속아 속절없이 꾀를 부리는 쪽을 택한다. 욕심부리지 말고(왜 이럴 때만?) 일단 크리스마스트리를 놓을 곳만 만들면 되니 딱 거기만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렇게 이른바 ‘소청소’가 시작됐다.     


        나의 목표물은 어두운 갈색의 플라스틱 재질의 5단 서랍장. 한 단씩 분리가 되는 것으로 2단, 3단으로 나눠 사용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3단 서랍장 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두기로 했다. 바닥보다는 그곳이 보관과 관리가 쉬워 보였다.      


        평소에는 3단 서랍장 위에 다이소에서 구입한 다소 특이한 디자인의 핑크색 수납함 하나가 아니라 또 그 위에 같은 핑크색 계열의 패브릭 바구니 하나를 더 올려 잡동사니들을 보관했다. 앞서 말한 ‘바구니 부자’가 되는데 일조한 제품들로 분명 마땅히 쓸 곳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집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차마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쓰던 것들이었다.  ‘산 게 아깝다’는 마음 하나가 ‘딱히 쓸 데가 없다’는 실용적 판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적 욕망 모두를 제압한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두 바구니를 숙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나는 분명 그 안에 잡동사니가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래야 마땅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지금까지 산 가죽 가방이 들어가 있었다.      


        대략 5, 6년 전 무렵부터 에코백을 들기 시작했다. 그것만 쓰겠다고 고집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가죽 핸드백이나 크로스백을 사용했던 것을 제외하면 일 년 중 330일은 에코백만 멨다.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가벼워서였다. 그러면서 나름 정리를 하겠다고 사용이 확 줄어버린 가죽 가방들은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해 둔 모양인데, 이곳 역시 그 장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럼 다른 가방들은 어디에 있지? 청소의 흐름은 이내 가방 정리로 흘렀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가방들을 모조리 꺼내 본다. 대략 20여 개. 살 때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가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이유들이 흐릿해져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게 되어 버렸다. 한때는 정말 소중했음에도 잊고 산 시간만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대부분 가죽이 상해있고 모양에 변형이 오기도 했다. 이럴 거면 나는 왜 그토록 소유하는 일에 집착했을까. ‘언젠가 한 번’은 들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 그 한 번을 위해 지난 몇 년간 그저 처박아 두기만 했다.      


        살 때 가격을 전부 더 하면 이번에도 버리지 못할 것 같았다. 다이소에서 산 바구니 두 개도 아까워서 포기를 못 하는 판에, 가죽 가방은 오죽할까. 그냥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들의 역할은 이미 예전에 사라졌다. 그래서 살 때 당시 매겨진 가격이 아까웠을 뿐 버리는 것이 아까운 가방은 없었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가방을 사들인 나 자신이 후회되기는 했다.      


        어쩌면 나는 물건을 정리하는 일에 돈을 버리는 것과 동일한 값어치를 매겼던 건지도 모른다. 10만 원짜리 구두를 버리는 것을 마치 10만 원을 길바닥에 버리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물건은 돈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쓸모만 필요할 뿐이다. 돈이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다. 나처럼 해서는 그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상승해 은행 이자처럼 불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지려 들수록 그나마 있는 돈마저도 줄 게 만들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그랬는지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 알았다. 이 책은 약 두 달간 ‘크리스마스트리가 불러온 나비효과’를 모두 경험하고 나서 읽은 책이다. 그러니 물건을 정리할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 순간의 나에게는 지난날의 이유가 아니라 앞으로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잠정적으로 두 달여의 대청소를 마친 후 내가 나에 대해 인정한 사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체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그렇게 많이 소유하려는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 물건을 갖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를 알리려는 목적'을 위해서다. 우리는 물건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누군가에게 알리려고 애쓰고 있다.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말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없다. 요즘은 더 나아가 ‘거거익선(크면 클수록 좋다)’이라고까지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나에게도 해당이 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다. 아니 그랬던 게 분명하다. 가방을 시작으로 집안 곳곳에서 발견한 텀블러, 반찬통, 화장품, 옷, 신발 등등은 그 사실을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방이 그랬듯 나는 그것들이 집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청소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점점 더 거대하고 거대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바구니 부자'가 된 사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