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이 힘들었던 이유.
크리스마스트리가 갖고 싶어서_9
'무지성 테트리스'로 빈틈없이 꽉 차있었던 냉장고. 모두 꺼내 놓고 보니 이렇게나 작은 냉장고에 이 모두가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냉장고 청소를 마치고 냉장실에 다시 입주를 마친 재료들은 김치 일부와 된장, 팽이버섯 한 봉지, 청양고추 조금, 낙지젓갈, 새우젓 그리고 다섯 개의 달걀이 전부였다. 냉동실에서는 떡볶이랑 먹다가 남은 순대, 냉동식품 중에서 가장 많이 먹는 만두, 우리 엄마표 보쌈, 아플 때 사 왔다가 소분해 두었던 야채죽뿐이었다. 나머지들은 음식물쓰레기봉투에 몸을 실었다.
전과 달리 텅 비어버린 냉장고 안을 바라보자 이제는 밥을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실은 들어갈 수 있는 게 없다...) 팽이버섯 된장찌개를 끓여 계란비빔밥을 먹기로 한다. 무생채가 가득 들어간 비빔밥이 먹고 싶었지만 핵심 재료인 무가 없으니까. 그나마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메뉴인 셈이다. 신기했다. 재료들이 넘쳐날 때는 시도할 엄두를 못 내다가 단출해진 냉장고 재료 앞에서 의욕이 솟아나는 나 자신이.
그런 말이 있다. 혼자 먹는다고 아무렇게나 대충 먹으면 안 된다고. 그건 마치, 자신을 대충 대하는 것과 같다고. 그 말이 처음부터 내 안에 꽂힌 건 아니었지만 몹시 신경 쓰이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반찬 가짓수에 집착했다. 3첩 반상(밥, 국, 김치, 장 이외에 세 가지 반찬을 내는 반상) 정도는 되어야 대충이 아니라고 여겼다. 한 그릇 요리를 하더라도 재료가 듬뿍 들어가야 하고, 라면도 기본 레시피에 항상 뭔가를 추가했다. 그래야 나를 대충 하지 않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간 시작이라서였을까. 딱히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외식과 배달 음식에 의존적인 나에게 밥을 차리는 일은 점점 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마음이 결국 귀찮고, 힘들고, 싫다로 귀결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나를 홀대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 매번 짓눌려야 했다.
대충이 아니라 잘 차려먹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예쁘게 세팅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오해했다. 매일 나를 대접하기 바빴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것들로. 그러니 지치지. 냉장고가 비어지고 그로 인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줄어드니까 저절로 생각이 심플해졌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부담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고.
가짓수를 맞추기 위해 반찬을 내가 만들어 먹을 때도, 사다 먹을 때도 한두 번 먹고 나면 질려서 더 이상은 손이 가지 않았다. 꺼냈다가 도로 넣기도 하고 결국엔 음식물쓰레기봉투로 들어갔다. 요즘은 국이나 찌개에 반찬 한 두 개가 다다. 그 하나도 김치니까 하나 정도만 더 준비할 때도 있고 그마저도 없을 때도 많다. 최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단은 밥, 된장찌개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냉동 고등어구이. 이렇게 먹다 보니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도 줄어들었지만 안 먹어서 버리는 반찬 양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달라진 건 또 있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대량 주문해서 냉장고를 가득 채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루 이틀, 길어도 3일 정도에 먹을 것만 사서 넣어둔다. 냉장고 문을 열면 한눈에 모든 재료들이 보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배달 어플을 켜고도 한참이나 메뉴를 정하지 못하던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변화이다.
장기 보관이 가능한 냉동식품이나 장류, 소스 등을 주문할 때는 여전히 인터넷으로 배달시키지만 대체로 동네 마트에서 그때그때 사는 편이다. 배달을 시키든 직접 가서 사든 가장 중요한 건 한 번에 여러 개를 쟁여두거나 오늘의 내가 아닌 다른 날의 내가 먹고 싶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사지 않는 것. 특히 요주의 대상은 후자다. 내일이나 모레에 먹고 싶을 것 같아서 사지만 그날의 나는 그걸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80% 이상이다. 미리 그리고 많이 사는 것. 이것이야 말로 '무지성 냉장고 테트리스'를 부추긴다.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꺼내기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다시 정리해서 넣는 것도 대공사라서 어렵게 찾은 집밥에 대한 의지를 여러 번 상실시켰다. 그래서였나? 전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이내 닫아버린 적도 많았다.
냉장고 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생긴 가장 좋은 변화는 끼니때가 되면 곧바로 배달 어플로 이끌던 생각이 이제는 '냉장고에 뭐 있지? 그래, 그게 좋겠다'로 이어지고 실행하는 것에도 전혀 거침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해진 밥 차리는 과정은 즐겁고, 맛도 좋다. 아니다. 맛있어서 즐거워진 건가?
두 달 여 동안 배달음식은 딱 세 번 먹었다. 이 변화를 눈으로 실감하는 건 재활용 쓰레기가 엄청나게 줄었다는 거다. 전에는 한 끼만 먹어도 플라스틱 그릇이 세네 개는 기본으로 쌓였다. 일주일 내내 먹으면 그 양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비록 큰 뜻이 있어서 변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위해 시작한 일이 지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살짝 뿌듯하다.
여하튼. 나는 요즘 잘 차려먹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