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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10. 2024

나에게 그릇이 많아진 이유.

크리스마스트리가 갖고 싶어서_10

        딱딱 오늘내일 먹을 것만 있는 요즘, 드디어 냉장고가 냉장고다워졌다. 냉동실은 70% 정도 입실률이고, 냉장실은 50%가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요리 실력도 없고, 음식도 잘 못하면서 입맛은 또 쉽게 질려하는 스타일. 한 번 꽂히면 2주 내내 먹어도 용서되는 김치볶음밥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똑같은 메뉴가 밥상에 오르는 일을 웬만해서는 허락하지 않는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런 원칙을 지키면서 지금의 냉장고로 끼니를 해결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늘의 메뉴는 얼마 전부터 먹고 싶었던 무생채 비빔밥. 무가 없어서 못 먹던 차에 마트에서 적당한 사이즈의 무 반토막을 사 왔다. 나물 종류가 대체로 그런 편인데 무생채도 맛있게 만들기가 어렵다. 여태까지 세 번 정도 시도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엄마한테 물어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유튜버가 알려주는 유명 레시피대로도 해 봤는데 그 맛이 아니었다. 나 같은 요알못들은 맛이 있다, 없다를 결정하는 혀 감별 능력은 뛰어날 수도 있으나 타고나길 섬세한 미각은 아니라서 도무지 무엇이 부족한지, 혹은 넘쳐서 생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수습하려 하면 할수록 망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냥 실패한 대로 먹는 게 최선. 뭐, 좋게 생각하면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닌 것도 같고.


        무생채는 레시피마다 약간씩은 달라도  재료는 대개 비슷하고 또 간단한 편이다. 채 썬 무, 고춧가루, 다진 마늘, 설탕, 식초, 액젓, 소금, 통깨. 아 쓰고 보니 많네... 암튼 분명 레시피에는 15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있었는데, 두 시간에 걸쳐 무생채를 만들었다. 그 사연은 이랬다.


        설거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먹자마자 치우는 사람'과 '다음 음식 먹기 전에 설거지를 하는 사람'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나는 후자인데, 그보다 더 나아가서 필요한 그릇이 없을 때나 하는 것이기도 하다. 1인 가구이면서 머그컵은 자그마치 12개, 접시도, 그릇도 종류별로 4개 이상은 된다.  맥주는 브랜드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르게 마시겠다고 맥주컵도 10개가 넘고, 텀블러도, 반찬통도 차고 넘쳐 수두룩하다.


        집을 방문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라면 이해라도 하지. 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집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 저 모두가 나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실은 애매하다. 더 정확하게는 한두 번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괜찮기 위해 마련하다 보니 점점 늘어난 결과물이다. 현재 개수대에 박힌 그릇들은 이틀 치는 족히 넘어 보인다.


        만약 그릇들에게 의지라는 것이 있었다면 개수대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 씻겠다며 욕실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 이렇게 매번 음식을 하기 위해서는 설거지라는 한 단계를 더 해치워야만 했다. 오늘도 무생채를 만들기에 앞서 설거지를 해야 한다. 사실 이 문제가 어질러진 냉장고 다음으로 집밥을 해 먹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설거지가 너무 싫었으니까.  그럼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를 하면 될 텐데, 이게 죽어도 안 되는 거다. 귀차니즘이 문제인 건 알겠는데 그 귀차니즘을 없앨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긴긴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무사히 끝내도 개운한 맛이라고는 일절 느낄 수 없다.  방금 설거지된 그릇은 물론, 이미 건조를 마친 그릇도 정리해서 수납장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뒤죽박죽 섞여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내가 보유한 모든 그릇들이 밖으로 다 나와있는 것 같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서 주방에 있기가 싫어진다.


'아, 그냥 배달시켜 먹을까?'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위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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