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 모퉁이를 돌며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채, 어떤 운명의 공간으로 불쑥 초대되기도 한다. 나에게서 친이모와 같은 어떤 이는, 친정엄마로서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딸의 결혼식장을 가야할 지, 말아야할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보내온 시간을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무엇이 그녀를 당연한 일에도 나서지 못하게 한 것인지를. 

 시아버지의 암선고 또한 그랬다. 팽대부암이었다. 십이지장과 담장, 그리고 췌장이 붙어있는 연결부위에서 암이 발생한 것이다. 면역기관의 주요 통로에 탈이 난 것이다. 예기치 않은 일들은 이처럼 삶 앞에 말그대로 준비도 채 못했는데 우리앞에 당도해 버리는 것이다.

 어느 수요일 아침이었다. 간헐적인 혈뇨가 한달째 지속되었고, 누가 보아도 황달이 뚜렷해졌다는 시아버지는 전화기 저편으로 이만하면 견딜만하다 여기셨지만,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이제는 가족과 의논할 때라는 듯 넌지시 아들 며느리에게 앞으로 해야할 바를 물어 오셨다. 어르신은 '내 몸은 내가 잘 안다'는 신념으로 병원을 안 가고 버티고 계시다가, 이제는 더이상 혼자 이것을 껴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서 전화를 하신 것이다. 서울 사는 의사 아들이 토요일에 일을 마치고 내려와서, 밤에 응급실로 모시고 가는 믿음직한 시나리오를 생각하신 것이다. 

 알수 없는 힘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올랐다. 아버님께 다시 전화를 했다. 지금 당장 병원을 가시라고 혼신의 힘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하셔서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하시는 어르신께, 식사를 해도 할 수 있는 검사가 분명히 있다, 토요일까지 버티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며 울며불며 통사정을 했다. 주말에 아들과 함께 병원에 가시는 것은 마음은 편안하실 지라도, 주말이라 그 어떤 검사도 진행되기 어렵고, 주치의를 만나지도 못하실 것이다. 몸에서 이미 혈뇨와 황달이 진행되며, 이렇게 몸이 망가지고 있다고, 어르신의 몸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이를 무시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결론을 전화기 저편으로 침을 튀기며 소리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버님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금요일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마무리 지으셔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기를 쓰고 달려오는 그 운명 앞에, 쉽게 무릎 꿇기가 어렵다. 오랫동안 지탱해오던 일상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나또한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생의 문이 언제까지 활짝 열린채로 기다려줄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새벽 비행기를 타고, 타지에서 열리는 딸의 결혼식에 갔다. 남편과 딸들이 결혼식에 꼭 가야한다고 엄마를 채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들에 대해서는 그냥 덮기로 했을 것이다. 단 한번 뿐인 그 순간 앞으로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아갔다. 우리는 수없이 주저앉고 울며 위로받기를 원한다. 위로받은 다음 다시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럴 틈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별일 아니길 바랐던 일들은 별일이 되어, 우리 앞에서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끝장날 것 같이 초시계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우리는 한고비 한고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의 한자락을 또 겨우 잘 넘겨낸 자신을 토닥여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