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였을까?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7.
서울에 올라와 아이를 키우면서, 그 주변에 집을 사고자, 많은 부동산들에 전화 품을 팔고, 집을 보는 임장을 다녔다. 특히 코로나가 시작되던 시절, 아이들을 기관에 맡기지 못하니, 혼자 두 아이를 카시트에 싣고, 낮잠을 재우기 위해 계속 차로 서울 곳곳을 돌았다.
남편을 설득해(말이 설득이지, 큰 기둥을 뽑아다 투자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보니, 투자에 보수적인 성향의 남편과는 어마어마한 갈등의 시간을 보냄), 소위 강남 3구 다음으로 일컬어지는, 마용성(마포 용산 성동구 지역을 이르는 말) 25평 아파트를 팔았다. 코로나로 공공장소에서 편히 화장실도 마음껏 못 이용하던 시절, 돌쟁이 아이의 똥기저귀를 낡은 부동산 상가의 귀퉁이에서 갈아가며, 나는 그렇게 신나게 임장을 다녔다.
조건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언가 하나씩 어긋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집마다, ‘서초구, 강남구로 이사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무언가 방향 수정이 필요한 일인지 점검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왜 강남구, 서초구로 갈까?
8.
그 사이, 제제는 여러 기관으로 옮겨다녀야 했다. 제제는 여러 이유로 환대받지 못했다. 그때는 부모인 우리도, 선생님도 제제에 대해 파악이 어려웠던 때였다. 다만, 보통의 아이들과 제제가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원을 옮기는 것에 나도, 제제도 지쳐 갔다. 옮겨 다니는 일은 무척 지난했기에. 그래, ‘다시는 이사하지 않아도 될’ <안전지대>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오래 설득 끝에, 나는 결국 서초구에 공동명의로 등기를 쳤다. 우리가 가진 자금으로는 이게 맞기도 했다. 매매가가 높은 강남권은, 전세가도 월등히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당장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또 다른 상급지로 가려고 크게 애쓰지 않는, 경제적 안정이 된 이웃들이 사는 곳. 제제라는 아이가, 자기 아이와 한 교실에 있어도, 제제 부모가 아이의 하루하루의 나아짐에 최선을 다하는 부모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곳. 과장하면 그런 ‘온실’을 내가 선택한 것이리라. 앞으로 얼마나 아플지도 모를 내 자신과 제제를 위해 ‘온실 속으로 쑥 들어와 본 시간’.
제제는 이미 수많은 편견과 물음표가 가득할 수 있는 아이이므로. 그냥 이곳에 사는 부모를 가진 것만으로도, 든든한 방패막이가 있는 아이라고 봐주기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사는 단단한 이웃들이 있기를 기대하며. 갑자기 나와 남편이 제제 곁을 떠나는 날이 온다 해도, 이 선택이 제제가 살아갈 어떤 기반이 돼주기를 바라기도 했을 터. 그 선택은, 어쩌면 제제보다는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떤 열패감에 대한 방어로. 제제를 내 나름의 <안전지대>로 이끌고 싶었던 마음. ‘나를 절대 쉽게 비난하지 마시오!’라는 껍질 속에 몸을 숨기고, 숨고 싶었던 시절이었음을.
남편은 그 돈이면 차라리 가성비 좋은 대치동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공부에 올인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기본인, 대치동으로 가게 되면, 수수를 키우는 데 있어서도 스트레스가 심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제제가 잘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대치와 바로 연결된 잠실과 서초동에서, 또 한 걸음 뒤의 동네, 반포와 압구정이 그래서 생활권이 된 것이다.
강남권은 영어유치원 수요가 많다 보니, 일곱살 제제를 받아줄 수 있는 국공립 기관의 티오가 남아 있었다. 원아당 교사 수가 많으면서도, 장애 원아가 있는 기관인 경우, 제제에 대해 너그럽게 대해주었고, 제제에게 추가 교사 인력을 배치해 주기까지 했다. 더구나, 실제 장애 친구들을 가까이서 보아온 일반인 원아들은 훨씬 따스하게 제제의 친구가 돼주었다. (제제가 어린이집을 한참 다니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제가 졸업한 어린이집에 우리 교회 부설 마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