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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종 Jan 24. 2024

더 이상 못해먹겠다, 교도관

 몸에서 나오는 이상 신호들


 교도관 업무는 굉장히 단순했다. 일명 계호(범죄자나 용의자따위를 경계하여 지킴)라는 업무이다. 수용자들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모든 일에 관여한다. 그들의 행위 뒤에 근무가 붙는다. '운동근무', '목욕근무', '접견동행근무', '입원근무' 등등


하지만 신체 사이클은 단순하지 않았다. 4교대 윤번제로 돌아갔다. 주간-야간-비번-휴무 그리고 주간-야간-비번-주간의 8번의 근무를 한 사이클로 돌았다. 중간의 휴무는 꿀같은 휴일이었지만 소내 사정상 바쁘면 출근하는게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쉬는 날이 많아 비번때도 임장을 다니고 운동도 다녔지만 근무연수가 길어지면서 비번날은 꼼짝도 못하고 쉬어야했다. 무기력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평생 교대근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보안과 일근도 있으며 행정업무 부서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보안 야근을 해야했다. 오래할 수록 몸이 망가지는걸 느끼자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직이라고 해봤자 할 줄 아는 것은 공무원시험때 준비했던 국어, 영어, 한국사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직장에 간다는 생각자체를 못했다. 머리 한켠에 아직도 평생 직장이기에 쉽게 그만둘 수 없는 뉴런이 자리자고 있었다.

 

 다른 공무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국가직 공무원 중에 교도관보다 큰 메리트를 갖는 직렬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주변 직원들 중 '사서직' 공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수직렬이라 합격점수의 등락이 심했고 교대근무를 하지 않고 원하는 도시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속된 말로 간수에서 사서가 된다는 주변의 인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전해보기로 했다.



 교도관에서 사서공무원으로



 우선 대학을 다시 가야했다. 사서 자격취득을 해야 사서직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서 자격취득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했다. 회사와 가장 가까운 문헌정보학과를 알게 되었고 '운 좋게' 야간 직장인반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국에서 야간 혹은 주말 문헌정보학과를 다닐 수 있는 학교는 몇 되지 않았다. 그 중에 하나를 다니게 되었다는 게 행운이었다. 학교와 직장을 병행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영어 단어를 외우려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핑계였다.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동산 공부도 잠시 내려놓았다. 최소한의 운동만 하면서 이직 공부에 올인하였다.


가석방 받으러 갑시다


 당시 나는 취사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수용자들의 식거리를 해결하는 중요한 업무였지만 몸이 고된 작업장이다. 사고가 나기 십상이며 수용자들의 연령대도 낮아 다툼과 분쟁도 많은 근무장이었다. 다행인 것은 다들 나를 좋아해주고 잘 따랐다. 심지어 내가 이직 공부하는 것도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기는 했다. 항상 근무복 안쪽에 수험서를 정리해놓은 노트를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스게 소리로 수용자들도 농담을 건네왔다. "부장님 같이 가석방 받고 나가시죠." "네 저도 그러고 싶네요."

 

 같이 근무했던 계장님도 너무 좋은 분이었다. 당시 동부구치소에서 승진을 하면서 오신 분이었다. 편견도 없고 나와 관심분야가 같았다. 부동산이었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계셔서 투자에도 관심이 많았다. 뜻하지 않게 상담을 많이 해드렸다. 당시 마포구 성산시영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가 폭등 직전에 매도를 하셨다. 집값이 어느정도 올랐다고 생각해 팔았는데 돈을 번게 아니었다. 충북에 작은 단독주택을 짓기 위해 팔았다고 했지만 안타까운 경우였다. 자녀들에게 어떻게 증여를 해야할지 그리고 현재 가용자금을 어떻게 투자해야할지, 서울 부동산의 분위기는 어떤지 등등 하루 1시간정도 매일같이 상담해드렸다. 덕분에 나의 이직 준비도 순탄하게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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