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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Feb 10. 2017

귀족주의가 된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공정할까?

아래 글을 읽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능력주의'는 오늘날 '노동윤리'와 묘하게 맞닿아 있는 개념이라, 늘 고민하게 되는 주제다. 이 두 가지가 나 자신의 행동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이끄는 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 담았던 글이 생각나 가져와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능력주의 = 공정성’이라는 등식을 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능력에 따라 평가받고 보상받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로 여겨진다. 애초의 능력주의는 신분으로 직업이 대물림되던 질서에 반하여 일어난 흐름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영이 1958년 《능력주의의 부상 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을 때, 그 단어는 이미 비판적인 뉘앙스를 띄고 있었다. 능력주의는 능력 있는 소수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비트는 용어였다. 능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사회에서 능력이 많은 이는 게임에서 승리한다. 결국 끊임없이 능력을 키우려는 이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이 승리를 뒤쫓는 사람이 되고 만다. 더구나 애초 능력주의가 탄생하던 때의 능력이란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 기능이거나 성과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은 잠재력이라는 말로 포장되는 모호한 개념이 되었다. 자신만의 기준 아래 절대적인 완성치를 추구하는 개인은 오히려 도태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도를 추구하는 장인이 빛을 발하던 시기는 끝났다. 언제 어느 때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즉각 ‘인식’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실제로 달성한 결과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로 이어지던 때는 지났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고 ‘인식’되느냐다. 평가와 보상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식 시장과 다를 바 없다. 주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기업의 실제 가치가 아니다. 시장이 그 기업의 가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가 주가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인식’이 진짜 ‘현실’이 된다.




출신 배경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경향이 높은 사회를 우리는 ‘불공정한 사회’라고 부른다. 그에 반해 능력주의는 공정한 사회의 기초로 여겨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출신 배경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성과가 소득 수준과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정한 사회란 대체로 결과가 평등한 사회라기보다는 기회가 평등한 사회다. 많은 나라, 특히 영미권 국가는 기회 균등과 능력주의로 공정 사회를 정의한다. 나는 2011년 여름을 영국의 정책 전문가 데이비드 핼펀이 쓴《국가의 숨겨진 부The Hidden Wealth of Nations》를 번역하며 보냈다. 이 책을 옮기면서 ‘과연 공정하다는 게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국가의 숨겨진 부’는 한 나라가 가지는 사회적 자본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스털린 패러독스(Easterlin Paradox)에서 출발하여, 경제 성장률이라는 지표 하나에 휘둘리지 말고 국민의 진정한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눈을 돌리자고 주장한다.(1인당 GDP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GDP가 더 성장하더라도 행복도가 그리 높아지지 않는다는 게 이스털린 패러독스의 요지다.) 이 책의 2장은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다룬다. 저자는 불평등이 능력주의의 결과일 수 있으므로 그 자체가 나쁘다고 치부할 수는 없고, 계층 이동성 저하와 심한 불평등이 함께 나타날 때 문제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 빈부격차가 엄청 심한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그걸 극복하기 어려울 때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나가는 말로, 능력주의가 구현되어 기회의 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사회의 불평등은 계급이 아니라 유전적 능력의 차이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슬쩍 언급된 것에 불과했지만, 이 말이 오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돈 많은 부모 밑에 태어나 잘 사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반감을 느끼지만, 능력이 좋아 돈을 많이 번 사람에게는 그다지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타고난 부에 따른 차별보다 타고난 능력에 따른 차별에 훨씬 관대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타고난 능력으로만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노력 또한 필요하며, 노력에 보상을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게 이 시대의 상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타고나길 개미인 사람이 있고 베짱이인 사람이 있다. 더구나 각종 학습장애, 집중이 어려운 선천적 특성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곤 한다. ‘집중하여 노력하는 성향’조차 어느 정도는 타고난다는 이야기다. 자칫하면 우생학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타고난 잘난 사람과 타고난 못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애초에 능력의 총량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공정하게’ 평가해 줄 세운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른 마당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이라고 수 있을까? 부모의 재력을 물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환경의 덕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나 귀족주의나 다를 게 없다는 식으로 손쉽게 결론짓자는 말은 아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보상하라는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그런 뜻도 아니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능력과 성과가 다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능력주의가 좋은 인센티브 시스템으로 작용해, 사람들에게 더 큰 능력을 끌어내기도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능에 따른 차별이나 물려받은 재력에 따른 차별이나 다를 게 없다고 머리로야 생각해도, 현실에서 빈둥거리고 일 못하는 직원과 성실하고 일 척척 잘하는 직원을 차별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늘 그렇듯이, 세상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50~60% 내외)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미국 사람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을 보면, “그렇다”는 답변 비율이 70% 미만인 나라가 18개국 중 11개국이나 된다.(2000년대 초반 즈음으로 오면 단 한 나라도 없다.) 능력주의가 공정사회와 같은 말이 된 것이 그리 역사가 긴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


베짱이가 불행하지 않아야 개미도 행복하다

어떤 사람은 일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미로 타고나 뭐든 열심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느긋하게 타고난 베짱이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개미만을 찬양하고 베짱이는 굶어죽어 마땅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개미와 베짱이가 친구가 될 리는 만무하며, 베짱이가 개미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능력주의를 스스로 뼛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개미도 나름의 이유로 불행해질 수 있다. 개미가 개미답게 산 탓에 베짱이 몫을 가로채는 상황이라면, 개미 역시 웬만큼 뻔뻔하지 않고서야 완전히 마음 편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결국 과도한 능력주의가 모두의 발목을 잡는다. 개미에겐 마음껏 치열할 자유를 가로막고, 베짱이에겐 속 편히 느슨할 자유를 빼앗는다. 그저 생긴 대로만 산다면, 개미는 사악한 승자가 되고 베짱이는 굶어죽는다. 느슨할 자유가 결국 치열할 자유와 만난다. 느슨히 가도 좋은 세상에서만이 개미 역시 생긴 대로 기꺼이 치열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느슨히 가도 좋은 세상’에서만, 개미조차 비로소 치열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누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자발성 없이는 재미도 없다. 아무리 타고난 개미라도, 억지로 하는 일에 흥이 날 리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느려도 좋을 권리가 있어야, 열심을 쏟을 무언가를 찾을 여백이 생기지 않겠나. 나는 한 인간의 ‘열심의 총량’이라는 걸 마냥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갖고 있는 열심 용량의 대부분을 밥벌이에, 그것도 그다지 원치 않는 밥벌이에 쏟아 넣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 때문에 개미에게도 베짱이에게도 세상이 재미없고, 사회도 이 모양이라고 생각한다면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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