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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Feb 07. 2017

미래가 어두워 다행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화제의 그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샀는데, 기대와는 다른 지점에서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많았다. 각기 다른 주제를 다룬 아홉 편의 글로 구성되어, 한 편에서 다른 한 편으로 넘어갈 때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하며 읽게 되었다.


그중 여섯 번째 꼭지 '울프의 어둠'에서는 중간중간 멈춰서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 읽고 또 읽었다. 이 꼭지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귀로 시작한다.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리베카 솔닛에게 울프가 말하는 미래의 어두움은 암담하고 컴컴한 어두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이다. 어두운 곳은 보이지 않으므로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알지 못하는 미래, 어떤 모습일지 미리 정하여 생각할 수 없는 미래야말로 "최선의 모습"이라는 선언은 어떤 '행동들'의 시발점이 된다.


언젠가, 새로운 기획을 흥겹게 의논한 자리 끝에 "사회변화를 믿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나는 잠시 머리가 띵해졌는데, 사실 나는 그런 차원의 문제를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사회야 당연히 변화할 텐데, 그 변화가 내가 원하는 방향일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믿건 믿지 않건, 내가 지금 하려는 일들을 한다. 리베카 솔닛의 이 글은 내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이 마음을 마치 읽어낸 듯이 대신 설명해준다. 완전한 타인인 저자와 누구와보다 온전하게 교감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솔닛은 울프의 말에 이어 로런스 곤잘러스의 글귀를 인용한다.

계획은, 즉 미래의 기억은 현실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 삼아 걸쳐본다.


이 말을 솔닛은 계획이 현실과 "합치하지 않는 듯할 때 사람들은 현실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계획에 매달림으로써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경고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모르는 것의 어둠, 희미하게 보이는 공간을 겁낸 나머지 종종 감은 눈의 어둠, 자각하지 못함의 어둠을 선택한다." 보이지 않는 어두움을 피하기 위해 밝은 곳에 붙들려 어두운 곳으로 발을 뗄 수 없다면, 어두운 공간을 밝힐 가능성은 끝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공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영원한 어두움으로 봉인되고 만다. 


그리고 두어 페이지 뒤에서 솔닛은 일흔 살의 수전 손택과 나누었던 대화를 회상한다.


당시에 나는 희망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려던 참이라, 그녀에게 우리의 행동이 소용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기억이 없고, 미래는 정말로 어두운데 그것이야말로 미래로서는 최선의 형태이고, 우리는 결국에는 늘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우리 행동의 효과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심지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인과를 예측하고 명징히 계획을 세워나가는 일은 물론 언제나 중요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고, 현실에 두 발을 담그고, 자원의 한계를 인식하며 현실성의 테두리 안에 일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한 눈은 미래의 어두움을 응시해야 한다. 그 어두운 미래가 현재가 되었을 때, 지금 하는 행동의 효과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심지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다시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 있다." 


어쩌면 나의 뜻대로,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뜻과 계획대로도 일이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불가지함과 불확실성이야말로 희망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사실과 이성을 초조하게 헤매는 대신에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이 소중하다.


어두운 미래를 한사코 밝은 신념으로 채색해야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어두운 채로 내버려두더라도, 여전히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내 몫의 끝에 무의미한 실패처럼 보이는 끝이 있더라도, 여전히 미래는 보이지 않아서 어둡고 그 실패의 효과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2015년 5월)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리베카 솔닛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2015년에 끄적여두었던 위 글이 떠올랐던 터라 브런치에 옮겨놓는다.

"분노가 지성과 짝을 이뤄 의미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의 화는 그리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리고 비관주의도 아닙니다. 희망은 이 둘 사이에 존재해요. 희망은 믿는 거예요.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믿음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괜찮다는 수긍이죠."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2)레베카 솔닛 “분노는 지성과 짝 이뤄 의미있는 변화 만들 때 가치있다”

“분노가 지성과 짝을 이뤄 의미로운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의 화는 그리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를 무너뜨리고 적폐를 치우고자 출구를 모색하는 한국, 도널드 트럼프를 선출하고 다시 그를 막아내려 희망을 모색하는 미국. 바다 건너 두 나라의 개인들은 다급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촛불을 들고 피켓을 들고 거리를 메우며 인터넷을 달구는 ‘썰전’이 치열하다. 대선 가도에 등장하는 후보에 따라 시대의 거대한 파도가 잔물결로 갈라지는 한국의 광장은 희망 속 불안에 갇혀 있고, 어둠 속 희망을 만들려는 미국의 개인도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 지성의 계보에서 든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레베카 솔닛은 우리에게 ‘아직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 불확실성을 부여잡자’고 조언한다. 솔닛은 행동하는 지성으로 환경과 인권 문제에서 오랜 시간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맨스플레인(mansplain·남성(man)과 설명(explain)의 합성어로, 남자들이 시시콜콜 가르치려 한다는 뜻)’이라는 단어로 21세기에도 만연한 젠더 불평등의 핵심을 명쾌하게 요약했다. 여러 저서를 통해 한국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민주주의를 방어하자(defend democracy)’는 슬로건을 들고 열정적인 활동을 하는 그는 미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날에도 트럼프 당선 저지를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모았다. 트럼프가 공식적인 대통령이 된 다음날인 지난달 20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았을 때, 그가 물었다. “어떻게 대통령 탄핵을 만들어냈죠?” 내가 답했다. “한 공간에 180만명이 뜨겁게 모여 차가운 이성으로 명령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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