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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주 May 06. 2018

보람만 좇아도 무사할 수 있는 세상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직장인이라면 차마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울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제목의 책이 지난 5월 출간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을 쓴 저자 히노 에이타로는 1985년생, 밀레니얼 세대의 첫 주자에 해당할 나이다. 이 책이 인기를 끌었던 건 과감한 제목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건 일에서의 보람이 돈만큼, 아니 때로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일터가 여전히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책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대개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하며 살아왔다. 자신의 리듬에 맞춰 일하고, 먹고살 만큼 일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해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일하도록 유인하느라 골머리를 썩었다. 그때 힘을 발휘한 것이 노동윤리다.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는 노동하는 개인을 구원의 확실성을 스스로 쟁취하는 주체로 상정함으로써, 종교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성실한 노동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종교적 함의가 사라진 뒤에도 노동이 곧 도덕적 의무라는 윤리는 여전히 맹위를 떨쳐왔다. 2016년의 우리 역시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윤리에 익숙하다. 성인이 되기까지의 교육 과정은 일하는 사람으로서 제 몫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듀크대학 케이시 윅스 교수(여성학)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넘어 일하기 위해 사는 데에는 노동윤리가 가장 큰 몫을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윤리의 힘은 탈산업화 시대에 오히려 더 맹위를 떨친다. 과거의 노동윤리가 노동자의 근면을 요구했다면, 오늘날의 노동윤리는 노동자가 기꺼이 일을 즐길 것을 요구한다. 일을 삶의 중심에 두도록, 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받아들여 긍정하도록 독려한다. 일을 즐기는 열정은 칭송받고, 그렇게 자신을 내던지지 못하는 이는 자괴감에 시달리곤 한다.  


고정된 일자리의 종말, ’탈일자리’의 가속화


  탈산업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에도 노동윤리는 이렇게 모습을 좀 바꾸었을지언정 여전히 힘이 세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자의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일자리 없이는 먹고살 수 없게 되었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루이지노 브루니와 스테파노 자마니는 함께 쓴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에서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킨 신기술은 사회적 시간을 생산공정에서 해방시켰고, 제도 환경은 그 시간을 실업으로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두 학자는 이런 상황에서 산업시대에 통용되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실업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자리 활동(job activity)의 개념과 그보다 훨씬 큰 ‘일’(work activity)의 개념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은 자본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일자리 활동뿐 아니라 각종 문화 활동이나 이른바 ‘관계재’를 생산하는 사회적 돌봄 활동 등이 포함된다. 때로 우리가 자조적으로 ‘잉여짓’이라고 부르는, 돈 안 되는 창작 활동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두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탈산업화 사회는 ‘일’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지 않은 채 넘쳐나는데 동시에 일자리 부족에 따른 실업문제로 고통받는다. 일자리 공급은 줄어 실업률은 점점 높아지지만 일 자체의 수요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 예를 들면, 실업자는 많아도 어린이와 노약자를 돌보는 활동에는 일손이 언제나 부족하다. 직장인은 회사에 붙들려 허구한 날 야근하느라 집안을 돌보는 일에는시간을 들이지 못한다.


  제1차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과 일자리 활동의 구분이 성립하지 않았다. 일하는 이라면 누구나 일자리가 있는 셈이었다. 대규모 공장 생산체제가 생겨나면서 일자리는 사회적인 것으로 재탄생했다. 혼자 일한다고 일자리를 갖는 것이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제 한 사람의 일자리란 대량생산 시스템에서의 좌표를 가리키게 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면서 일과 일자리의 의미는 역전되었다. 이제 일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일한다 해도 그의 일은 ‘일’이 아닌 걸로 취급받는다. 본래의 의미에서 더 넓어야 할 일의 정의는 일자리 활동, 다시 말해 돈벌이로 축소되고 말았다.


  브루니와 자마니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모두에게 임금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다. 그래서 “고정된 직업으로 규정되는 일자리 영역의 경계를 없애버리고 다른 일의 영역을 넓힐 것”을 그들은 제안한다. ‘일’을 노동시장의 고용체계로 규정하는 산업화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두 학자는 오늘날 우리가 탈일자리(dejobbing), 즉 고정된 일터의 종말이라는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하는데, 이것이 활동으로서의 일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시대에 일하는 개인들은 각자 일종의 ‘일의 포트폴리오’를 꾸려가며 살게 된다. 하나의 일자리, 하나의 직업으로 자신을 정체화할 수 있는 시대를 지나, 일하는 생애에 걸쳐 이뤄지는 활동으로 자신의 노동을 재구성해야 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조차 낡은 표현이 된 지 오래고 일하는 인생 전체에 걸쳐 여러 차례 이직, 전직해야 하는 것은 이미 당연하게 여겨진다. 커리어에 걸쳐서 뿐만이 아니다. 한 시점을 찍어서 보아도 그렇다. 동시에 이뤄지는 여러 다른 활동을 모두 자신의 ‘일’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12년 <포브스>는 칼럼에서, 돈을 벌기 위한 직업 말고 다른 활동을 병행하는 사람이 늘어가는 현상을 두고 ‘멀티커리어이즘’(multi-career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을 하나의 직업이나 직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을 ‘프로그래머이자 작가이자 목수’와 같은 식으로 소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주 30시간 노동의 결합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을 좁은 일자리 활동의 범위에서 풀어내, 스스로 일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며 사는 것은 탈산업화 시대의 좋은 전략이겠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하려면 넘어서야 할 두 가지 현실적 난관이 있다.


 첫째, 경제적 불안정성이다. 대다수가 자본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통해서만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구조에서 일자리로 한계지어지지 않는 일이란 허망한 관념에 그치기 쉽다. 일자리 활동뿐 아니라 다양한 ‘일’로 포트폴리오를 채운다 한들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포트폴리오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사회적 해결책은 있다.


 바로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념에 입각해 있다. 산업화 시대의 일자리 개념이 점점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과거 기본소득이 일부 좌파들만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의 논의는 완전히 다른 흐름을 타고 있다.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같은 세계적 벤처기업을 발굴한 미국 실리콘밸리의 창업투자 인큐베이터 와이콤비네이터(Y Combinator)가 기본소득 실험에 나선 것은 이런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와이콤비네이터는 올해 8월부터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100가구를 선정해 6개월에서 1년간 아무런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에 착수했다. 이는 일종의 파일럿 실험으로, 여기서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5년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앞서 스위스에서는 지난 6월 기본소득 시행 여부를 놓고 실시한 국민투표가 큰 관심을 받았다. ‘정부는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공적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재원 조달 방안은 법률로 정한다’는 3개 조항을 헌법에 넣을 것인지 여부를 두고 치러친 국민투표였다. 비록 부결되기는 했으나 기본소득이 일부 몽상가의 아이디어로 치부되는 것을 넘어 공식적인 정책 의제로 떠올랐음을 보여주었다.


  일의 포트폴리오가 보편적 전략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두 번째 장벽은 시간의 한계다. 2015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1인당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길다. 매킨지와 대한상공회의소가 2016년 3월 공동으로 발표한 <한국기업의 조직 건강도와 기업문화 진단 보고서>를 보면, 조사에 참여한 직장인의 평균 근무시간은 10시간58분이다. 일주일에 평균 2.3일 야근하며, 3일 이상 야근한다고 답한 이도 응답자의 43%나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 활동이 아닌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서도 노동자가 하나의 일자리에 근속하는 기간이 예전보다 짧아지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다양한 활동으로 일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며 커리어의 다음을 준비할 수 있기는커녕, 깨어 있는 시간 거의 전부를 털어넣으며 소진되어가는 게 현실이다. 케이시 윅스는 기본소득과 함께 주 30시간 노동제를 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야만 삶의 가능성을 노동 이상, 즉 일자리에서 활동 이상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긴 근로시간은 특히 여성의 일에 더욱 족쇄를 채운다.


 여전히 젠더 분업이 공고한 가정에서 직장 여성은 일이냐 가정이냐는, 남성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직장인 남성이 하루 11시간 가까이 일해야 한다면 그 남성이 가사노동을 의미 있는 수준으로 분담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결국 과거에 그래왔듯 가사노동은 으레 여성의 몫으로 남는다. 일하는 여성은 육아와 집안일과 직장일 사이에서 달음질치면서,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실 아래 무엇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OECD 회원국 중 압도적으로 높은 여성 경력단절률을 보이는 것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비혼을 선택하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루 평균 11시간을 직장에 붙들려 있다는 우리나라에서 주 30시간 노동은 꿈같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평생에 걸쳐 일의 포트폴리오를 기획하며 살아가는 미래를 위한 조건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주 30시간 노동제의 사회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위한 시간뿐 아니라 시민 간의 새로운 연대를 구축할 시간, 개인적 즐거움을 누릴 시간, 새로운 삶의 방법과 주체성의 모델을 창조할 시간을 허락할 것이다.


책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사회?


  모든 경제학이 보는 인간은 인류학적 관점을 전제로 한다. 주류 경제학이 인간을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로 보며 도구적 합리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사회적경제를 주창하는 학계는 인간을 ‘호모레시푸로칸(상호적 인간)’으로 보고 상호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는다.


 기본소득이 탈산업사회의 노동을 위한 합리적 답이 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인간 본성에 일의 욕구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든 일한다. 다만 그 일이 협소하게 정의된, 일자리로 환원되는 돈벌이가 아닐 뿐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을 때, 우리는 “일하지 않더라도 먹을 권리가 있다”고 외칠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자가 대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든, 할 수만 있다면 일을 한다.


       일이 곧 돈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일은 얼마나 빈곤한가. 그리고 그렇게 빈곤해진 일에 최소한 하루 8시간, 아니 11시간을 쏟아넣어야 하는 삶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런 일자리조차 얻지 못할까, 또는 지키지 못할까 하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해야 한다면 그건 삶이 아니라 버티기가 아닌가.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오늘의 이 내리막 세상이, 이미 그러하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이 말이 힘을 얻었던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일의 보람을 원하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일자리 구조 안에서 평균 11시간을 일하고도 어떤 장기적 미래도 계획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회사가 정의하고 기대하는 보람이 더 이상 일하는 개인들의 보람이 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많은 사람이 보람을 좇다가 재주만 부리는 곰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보람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며 제각각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의 저자 히노 에이타로는 말한다. “사람은 결코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 일 말고도 결혼, 출산, 육아나 취미, 봉사활동 등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아주 많다.” 브루니와 자마니의 개념을 가져온다면 육아와 취미, 봉사 활동은 일자리 활동이 아닐지언정 ‘일’은 충분히 될 수 있다. 무엇이 일이고 일이 아닌지 그 정의를 일자리와 고용 여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모두가 기본소득을 누리고 일자리 활동에 주 30시간만 쏟아도 되는 사회는 돌봄 활동, 연대 활동, 정치 활동, 창작 활동을 모두 ‘일’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일자리 활동은 아닐지언정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고 그를 통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오롯한 ‘일’이 아닌가.


  일을 통해 돈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 덕에 각자의 일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오롯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사회에서 우리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할지도 모르겠다.  (끝)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h21.hani.co.kr/arti/HERI/H_special/425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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