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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아래 Oct 11. 2023

뭐든 잘하고 뭐든 진지했던 20 살

아무 일기

이제 진짜 나이가 어지간히 들어가고 있어서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광고에서도 지난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냥 돌아보기만 하면 허허 그땐 그랬지 하고 말겠지만, 돌아보는 그 끝엔 지금의 나로 이어져 결국 이렇게 나이 들어갈 뿐이야 젊은 시절의 나에게 미안해!! 백만 번 사과하게 된다. 아쉽고 아까운 나의 총명함이여. 그때 그 빛나는 재능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나를 아무리 질타한들 돌이킬 수도 없는 과거인데…. ‘지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는다’하는 나름의 신조는 최근에 -어휴- 그냥 버렸다. 아니 내가 내 맘껏 자조적으로 투털거림조차 참으며 살아야 되냐! 고 칭얼대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여하튼 다시 또 사설이 길다.

이번 광고알고리즘은 책이다. 어떤 작가가 쓴 미술서적에 대한 것인데, 광고 타이틀을 보자마자 나의 20살에 유럽선교를 떠나는 교회청년부를 위해 만들었던 미술사 가이드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나는 당시에 엄마등쌀에 못 이겨 교회 청년부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그러니까 내가 20살이던 그 해, 유럽선교단을 모집했었고 나도 목사님의 강권에 의해 그 선교단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정말 나의 의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선교여행에서 빠질 수 있을까 내내 핑곗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공교롭게도 그 계절에 딱 맞춰 무릎 수술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선교라는 부담스러운 행보에서 빠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유럽전역을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교회와는 어떤 인연에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고 나는 참석하는 인원인 반의 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뭔가 그 행보에 기여하고 싶었었나 보다. 깁스를 한 다리로 문구점에 가서 인원수만큼의 다이어리를 사고, 당시 윈도 컴퓨터 한글프로그램으로 잘 맞추기도 힘든 프린터 설정을 요래조래 짜깁기를 해서 하나의 페이지로 만들어 다시 다이어리 사이즈로 접어 바인더에 끼워 말 그대로 ”김현주의 유럽 미술관 투어를 위한 미술사 가이드“를 만들어 내었다!! 선교라고는 하지만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의 유럽 견문여행이라는 목적도 다분한 여행이었기에 만약 내가 동행한다면 꼭 들러보고 싶은 일정에 포함된 어느 도시의 어느 미술관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조사하여 정리한 내용을 담았다.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은 그 시절은 인터넷이 아직 대대적으로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는 점이다. 나는 그 깁스한 다리로 목발을 짚어가며 교보문고를 찾아가 수많은 미술서적을 찾아가며 직접 구매할 수 없는 책들은 필사로 발췌해 가며 그 내용을 정리했었다. 당시 선교여행 참가자들은 대부분 미술에 문외한 전공자들이었기에, 어떤 미술관에 가게되면 이러이러한 작가의 저러저러한 작품이 있다고 하니, 그 작품은 기법적으로 이러한 것이 특징이고 특히 종교적으로 이러저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눈여겨보고 큰 영감을 얻길 바란다는 첨언도 얹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검색하면 수없이 쏟아질 내용들이겠지만 당시 인터넷 검색으로는 이미지 컷 구하기도 힘든 내용들을 말 그대로 글로 배우는 미술의 시기였으니 실물의 작품을 접하는 경험은 솔직히 놓쳐 아까운 부분이었기에 그들이 대신 만끽 해주길 바랐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들이 내가 실물로 보고 싶어 한 렘브란트의 그 깊은 어두움을 그 안에 함축된 작가의 의도를 읽고 왔을까? 확인할 길은 없는 그 가이드 다이어리를 만드는 며칠이 정말 너무도 신나고 진지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행의 귀찮은 짐이 되었을지도 모를 내 맘대로 만들어 내 맘대로 목사님께 안겨드렸던 그 다이어리 가이드북 만들던 정성과 집중력을 지금 발휘한다면 난 뭘 잘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근간에 들어 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뿐이다 보니, 광고가 지나가는 그 짧은 찰나에 20살의 반짝이던 뭐든 잘하던 어린 내가 떠올랐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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