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프랑스나 불어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감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지향은 여전한 것 같다. 고등학교 수업 중 가장 열심히 들었던 수업이 바로 프랑스어였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그냥 좋아하는 마음이었지 대학 전공으로 지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초등학교때 인생의 목표를 리듬체조 선수로 정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고 이후 내 인생은 계속 방황기였다. 과학 경시 대회 같은 곳에서 상을 타면 과학자를 해야 하나, 티비를 보다 보면 방송 관련 직업을 해야 하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십대를 보냈다. 어머니는 언제나 실용적 전공을 우선시 하였기 때문에 인문계에서는 그나마 취직이 잘되고 여자에게 가장 좋다고 하시며 교사 자격증을 강력하게 권고하셨다. 나는 뭔가 지루해 보여서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모녀의 절충안으로서 마침내 불어교육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학과에 들어가자마자 1학년 과대표가 되어 술을 엄청 마신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끝물이긴 해도 사범대에 운동권의 영향력이 상당히 셀 때 였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사범대에 가면 조신하게 교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을텐데 종종 거리에서 힘차게 데모를 하고는 했다. 게다가 그 당시 고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는데 한국을 동북아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며 고등학교 주요 제2외국어였던 불어반과 독어반을 없애고 일어반과 중국어반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따라서 프랑스어 교사 T/O가 급격히 줄었고, 여전히 교사가 되고자 하였던 친구들은 이중전공으로 다른 과목 교사가 되었다. 나의 경우 프랑스어 교사가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나중에 이전부터 관심 있던 신문방송학을 이중전공으로 택하였다.
고등학교에서는 불어를 곧잘 했지만 대학 불어의 수준은 꽤 어려웠다. 그래서 어학 전공하는 많은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프랑스의 뚜르라는 곳이 옛날 수도이기도 하고 발음이나 억양도 정확한 곳이라는 유학원의 추천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참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으로 기억한다. 프랑스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너무 잘 만나서 정말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하고 왔다. 파리나 니스, 깐느, 모나코, 몽쌩미셸 등을 여행하기도 하였고 이웃 나라들인 이탈리아와 영국도 여행했다. 파리에선 자연스레 미술관을 참 많이 다녔던 기억이 있고, 프랑스 생활은 정말 미식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홈스테이 프랑스 가정식은 내내 맛있었고 제빵제과의 나라답게 정말 맛있는 빵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수를 다녀와서 2학년 2학기로 복학을 하게 되었고 나는 본격적으로 학점 관리 등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1학년 학점이 별로이기도 했고 교직 이수와 신문방송학 이중 전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공 점수가 잘 나와서 다른 교육학이나 신문방송학 수업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교육학에 원래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수업을 들으니 교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실생활에 혹은 학문적으로도 정말 도움이 되는 수업들이었다. 교육 사회학 수업을 듣다가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후 사회학 석사에 진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어학 전공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인 신문방송학 수업도 매우 흥미로웠다. 저널리즘 연구 같은 학문적인 분과도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같은 실용적인 분과도 모두 재밌고 이후 일이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용 어학 클래스도 사실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실용 영어 클래스에서 카프카의 "변신" 독해 수업을 들은게 기억이 많이 난다. 그 외에도 다양한 교양 수업들은 평소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었던 것 같다. 영화, 미학, 종교, 컴퓨터, 미술, 철학 등 흥미로운 수업들이 많았다.
불어교육과 1학년 때였나 그때 학과에 몇개 학회가 있었는데 나는 문학학회 활동을 했다. 고전 문학 작품을 골라 같이 읽고 소감을 나누고는 했는데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이 유명한 작품들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학학회 말고 또 기억에 나는 학회는 샹송학회였는데 상당히 인기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샹송학회 친구들이 과실에 모여 부르던 샹송들은 아직도 친숙하게 남아있다. 교직 이수를 하기 위한 필수 과정인 교생 실습도 잘 마쳤는데 나는 대원외고에서 불어 원어로 교생 실습을 했었다. 사실 나는 일반고를 나와서 복도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친구들이 좀 신기하긴 했다. 서울에 있지만 미국 고등학교 느낌이었고 그곳에서 프랑스어로 수업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고 흔히 생각하는 교생 생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한달여간의 생활은 작고도 큰 듯한, 사회 혹은 세상 체험이었다.
학부 졸업 후 브랜드 에이전시에서 브랜드 컨설턴트로 몇개월 일하다가 결국 사회학/문화연구 석사 과정에 진학하며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내에서 석사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인류학과 문화연구 박사 과정에 진학하였고, 현재는 다시 국내에 들어와 논문 라이팅을 마무리 하고 있는 중이다. 얼핏 보면 프랑스나 프랑스어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일 수도 있지만 사실 어딜 가든 연관이 될 때가 꽤 있었다. 브랜드나 광고 분야에서 프랑스나 프랑스어는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할만한 작품들은 프랑스인들에 의해 많이 쓰여졌다. 리듬체조에의 미련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5년 전부터 다시 꾸준히 하기 시작한 취미 무용에서도 새삼 프랑스의 영향력을 느끼곤 한다. 처음 발레 클라스를 들었을 때 동작을 못하는데도 용어는 대충 알아들었다. 발레 용어는 거의 다 프랑스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프랑스에 가면 세계 탑 클래스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공연을 꼭 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사실 아직도 2000년대 초반 고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에 좀 불만이 있다. 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수업이 불어 수업이었는데 어째서 불어랑 독어 수업을 거의 다 없애 버리다시피 했는지, 일본어랑 중국어 수업을 조금 늘릴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불어와 독어를 없앨 필요는 없었지 싶다. 문화와 예술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대이니만큼 프랑스와 독일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접하고 또한 할 수 있는 것은 다시금 그 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보면 프랑스어반을 가는 친구와 독일어반을 가는 친구들의 성향이 갈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뚜렷한 문화적 경향성과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기에 매력적인 것 같다. 물론 한국 학교 과정의 다양성 없음이 비단 제 2외국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점점 줄어 든다고 들려오는 예체능 과목도 안타깝기만 하다. 되돌아보면 고민도 방황도 좌절도 많이 했던 나의 십대와 이십대였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굉장히 보람차게 그 시절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