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 이야기

에쿠니 가오리,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by 모현주



오랫만에 에쿠니 카오리의 책을 들었다. 한동안 그녀의 소설들에 빠져서 많이 읽고는 했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가장 유명한 그녀이지만, 그 외에도 "반짝반짝 빛나는"이나 "울 준비는 되어있다" 그리고 "웨하스 의자" 와 같은 책들을 읽으며 알 수 없는 위로를 받고는 했다.

아마도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남자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이고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에쿠니 가오리일 듯 하다. 이 둘의 작품들은 읽고 싶은 마음뿐 아니라 쓰고 싶은 마음을 주었다는 점에서 더 특별했던 것 같다. 일상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이 이야기꾼들은 마치 친구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싶다.

요즈음은 이들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많이 읽게 되는 것 같다. 하루키야 에세이를 많이 썼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는 이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엔 그녀의 에세이와 단편 소설이 구분 없이 담겨 있는데 큰 구분이 안간다는게 재미있었다.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 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현실 세계와 책 속의 세계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이 어딘지 모르게 와 닿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바게트를 당장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기도 했다. (실제로 책 읽다 중간에 바로 바게뜨를 사와 뜯어 먹으며 후반부를 읽었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사람을 에세이를 통해 새롭게 만나니 보다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또한 조금은 다른 점이 무엇인지도 잘 느껴졌다. 현실이나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비슷하지만, 64년생인 그녀의 아날로그한 취향이라던지 현악 위주 음악 취향은 조금 다르기도 했다.

내게 "뉴 밀레니엄" 이라는 2000년대, 특히 2000년대 중후반 이후는 그렇게 평탄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 때 어지러이 펼쳐지던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그나마 내가 숨쉴 수 있던 장소가 되어 주었던 것이 이들의 책 (그리고 음악) 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을 읽다 보니 그 때 생각도 나고, 마치 오랫만에 만난 친구와 수다 떠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린 시절 세계관 (!) 형성에 도움을 줬다는 미피 시리즈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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