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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공장 Oct 19. 2023

0명이 참가한 행사

#37 이미 실패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때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부터 날 재워주기로 한 친구 젠이 일요일부터 내내 심한 기침을 하며 아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난 주말부터 나는 다른 친구 조안의 집에서 지내며 새벽동안 진행되는 세미나를 참여했고 조안은 고맙게도 자기 네 집에 친구가 출장 가기 전까지 있으라고 했다. 젠은 원래 오늘 수요일에 출장을 가기로 했다. 젠이 출장을 가면 그때 젠의 집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동안 예상치 못하게 조안의 집에서 길게 머물며 지내면서 얇은 긴팔 하나 있던 생활을 청산하나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젠이 출장을 포기하고 집에 남기로 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아픈 친구가 출장을 가지 않게 된 건 축하할 일이었지만 그때부터 두뇌가 바쁘게 움직였다. 젠이 출장을 가지 않는다는 건 오늘도 잘 곳을 알아봐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젠을 사랑하지만, 일주일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아플 수 없었다. 또한 책 이벤트를 하며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데 내가 보균자가 될 수 없었다. 덧붙여 젠도 나도 내 친구들 대부분은 보건/의료 쪽 종사자들이다. 아프면 괜찮냐는 질문 대신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한다. 처음에는 나도 야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를 위해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좀 귀찮아지긴 했지만, 잘 됐다 싶었다. 기침을 많이 했다는 젠의 집에서 있는 게 영 찜찜했었다.


바로 생각난 건 전에 며칠 묵었던 알렉산드라 네 집. 일단 사정을 얘기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다음주 화요일 아침 일찍 출국하고 토요일에 하크니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가기로 했으니 오늘 수요일부터 토요일 아침까지만 있을 곳이 필요했다. 일요일, 월요일 저녁은 다시 젠의 집에서 지내면 됐다. (젠은 금요일부터 웨일즈 휴가가 계획되어 있다) 적어도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3일동안 집이 빌테고 여행의 막바지기도 하니까 그럼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알렉산드라가 답장이 없어 지금 지내는 조안에게도 문자를 남겼다. 상황은 이렇고 토요일까지 지내도 괜찮냐고...


근처 펍에 나가 점심을 시켜놓고 메일을 확인하고 보내고 있는데 내일 만나기로 한 친구 나비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분이 싸했다.


문자를 켜자, 긴 글이 나왔다. 흠. 안 봐도 무슨 얘길 지 알 것 같았다.


"시어머니께서 기침을 하고 나도 감기에 걸렸다. 네가 오는 게 우린 괜찮지만, 너가 괜찮지 않으면 내일 우리 집에 오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의 컨디션이다. 아프고 싶지 않았고 아프면 안됐다. 동시에 '최대한 책 행사를 많이 하고 가기로 했는데...'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음에는 나의 건강을 우선시 하는 것과 최대한 책 행사를 많이 하는 게 상충되는 내용인 줄 알았다. 사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파도, 바빠도, 그냥 다 하던 습관을 가졌었는데 이번에 깨달은 건 비슷한 상황에서 가지 않는 걸 선택하는 게 강연하는 사람들의 상식같은 거란다. (상식은 좀 강한 의미일 수 있다. 그냥 느낌만 보길 바란다) 누구를 만날 지 모르고 (그러니 무언가를 옮기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더 나아가 결국 나의 컨디션이 최상이어야 내 행사에 오는 사람들을 더 잘 섬길 수 있다.


나비라에게는 줌으로 책 행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다시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금요일 있을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책 행사에서 책을 팔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래도 되고 그러면 전체 수익의 10%를 도서관에 줘야한다고 했다. 궁금하면 못 참는 나니까 바로 왜 그런 거냐고 물었고 답이 오기로는 원래 이벤트는 유료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거기에서 운영비를 충당하는데 우리처럼 이벤트를 무료로 여는 경우에는 도서관에서 이득을 얻으면 나에게 나눠주고 내가 이득을 얻으면 도서관에 나눠주는 형태란다. 자치구마다 다르니 자치구의 규칙도 확인하라고 했다.


연락의 상황에서도 42개의 이메일을 총 79개의 도서관에 보냈다. 보내면서 금요일 행사 직전에 내 커리어 관련 행사의 디테일이 적힌 이메일을 찾다가 찾지 못해 관계자에게 연락하니, 원래 커뮤니케이션 했던 행사 시작 시간이 4시가 아니라 5시 15분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책 행사는 35분 거리에 있고 시작은 6시니. 절대 못 간다.... 못 간다는 이메일을 다시 보내고 나비라의 문자를 떠올리면서 내 목요일과 금요일 스케줄에 큰 변화가 생기겠다고 생각했다.


행사 때 필요한 물건과 겨울옷을 드디어 좀 챙겨오자 싶어서 젠의 집으로 향했다. 비가 오는데 이런... 심상치 않다. 이미 오늘 하루가 어디로 갈 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오늘 강연 초단기 어레인지를 한 거라 사람이 별로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비가 엄청 오고 (비오면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가도 안온다)

원래 나를 재워주기로 한 친구는 아파서 여기 저기 잘 곳을 알아보고 있고

그 집에 있는 짐을 강연 전 얼른 챙겨 비를 맞으며 런던 시내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진짜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과거 같았으면 이야기를 만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냥 이걸 경험하는 이 순간, 기회가 있다는게 너무 행복했다.


한 명(담당자님)이 와도 재밌을 것 같고 아직 강연을 뭐라고 시작할 지 나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연습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괜찮았다.


그냥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계획대로 되는 게 지금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계속 대처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집에 가만히 있었으면 경험하지 않았을 것들을 경험하는게 참 감사했다.

♥ 





젠의 집에 내가 도착할 당시 젠은 팀에 같이 일할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다음 강연으로 마침 15분 정도밖에 없던 나는  뜨뜻한 바지와 티셔츠와 드디어 긴팔, 스웨터,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들, 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캐리어에 쑤셔넣고 강연 장소로 갔다.


비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한국에서 우산 하나 챙겨오지 못한 나는 그나마 파트너가 준비해준 고어텍스 자켓을 하나 입고 이벤트 장소로 향했다.


영국 비의 특징. 얼굴을 때리듯 내린다. 어떻게 잘 막아도 항상 바람이 얼굴 방향으로 분다. 얼굴에 강력한 미스트를 뿌리는 느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


담당자님은 오늘 RSVP를 작성한 담당자 명단을 내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신청했고 생각 외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리 부탁해드린대로 담당자님이 다 준비해주셔서 (심지어 책 받침대, 노트북, 종이 세워놓는 플라스틱 판) 생각을 더 할 것도 없었다. 내가 준비해 간 음악은 좀 이상해서 (닌텐도 orbit) 인터스텔라 OST로 바꿨는데 이것도 영 행사와 맞지 않다. 금요일 행사 때는 또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담당자님께 지난 번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이야기, ‘내 목표는 Foylers와 Waterstones Gower tower에서 책 행사를 하는 거에요’를 나눴다. Foylers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내 책이 Foylers의 시스템에 이미 올라가 있다고 했다. 담당자님 얘기로는 출판사가 Foylers와 조율하면 된다고 했고 (난 내 방식대로 담당자에게 직접 연결해 볼 것이다) Waterstones는 피카델리에 있는 것 뚫어보는 게 담당자님의 목표라고 했다. 내 목표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번에 내가 행사들을 뚫은 것이 자신은 정말 신기하다고 하셨다. 이 몇 달 앞을 계획하길 좋아하는 영국/유럽에서 단 1~2주도 안돼 행사를 하기로 한 건 말도 안된다며 대영도서관의 경우는 2~3년의 계획이 이미 짜있다고 했다. 


두 명의 친구가 오려고 계획했는데 결국 오지 못한다고 문자가 왔다. 두 친구가 올 줄 몰랐는데 올 생각이었다는 말에 놀라면서도 결국 오지 못한다는 문자를 보니 이럴 거면 왜 문자를 남겼나 싶었다. 말해주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을텐데...


비가 오고 사람들이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또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담당자님) 그걸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리저리 세팅을 하고 책을 옮겨보고 내 자리를 옮겨보고 괜한 테이블을 가져오고를 반복하다 결국 가장 익숙한 노트북 뒤로 숨었다. 바로 떠오르는 감정을 적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딱 지금만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노트북 뒤로 숨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오든 오지 않든 결국 나는 사람들이 얻을 것을 얻고 얻지 못할 것을 얻지 못하게 도울 것이고 그걸 준비하는데 집중해야겠다.


그렇게 20분 기다리다가 오늘은 아무도 안 오는 구나, 담당자님을 앞에 두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윗층, 로비로 올라갔다. 담당자님이 홀로 로비에서 출입구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오다가도 도망가겠어요, 할 포스로 입구를 보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엄청 귀여웠다.


로비에 앉아서 담당자님께 관심사가 무엇인지 물었고 담당자님은 진로와 삶에 관한 고민을 나눠주셨다.


그렇게 6시 30분까지만 기다려보자고 했는데 40분이 되자, 우리는 오늘 행사에 0명이 왔다고 여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담당자님은 충분한 홍보 기간이 없었다며 마치 사람이 오지 않은 게 자신의 실책인양 엄청 미안해 하셨다. 나는 에세이에 쓸 재밌는 이야기 거리가 생겨서 괜찮다고 말씀드렸고 실제로도 상황이 흥미롭고 재밌었다. 어쩌면 이럴수도 있다는 걸 이미 몇 주 전에 New Unity에서 강연하면서 느껴보고 시뮬레이션 돌려봐서 그랬던 것 같다. 


미안하셨는지 사진이라도 찍어주신다고 하셔서 문화원 로고가 들어간 사진도 찍었다. 뭐가 또 가능할까를 생각하다가 책 2권을 문화원에 기증하고 신착 도서 코너에 집어 넣었다. 담당자님께도 한국어로 된 책을 한 권 드렸다.


담당자님과 행사장 문을 닫고 나가서 길을 걷는데 담당자님 앞에서라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니, 흔쾌히 '엇, 그럼 하실래요?' 하셨다. '네!'하고 싶었지만, 행사장 문은 이미 닫혔고 배는 고프고 춥고 배고프니 잠은 오고 결국 코벤트 가든 근처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에 갔다. (베트남 음식점은 항상 옳다)


다음에 불러 주실 때는 엄청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게 충분한 기간을 갖고 홍보해주시겠다고 하셨고 나는 단기간에도 매진이 될 수 있게 그동안 엄청 커서 오겠다고 했다. (어디 가지 마시고 오랫동안 기관에 있어주세요 담당자님 ! ㅎㅎ)



오늘의 요약:

오늘은 0명이 온 행사를 했다. '0명의 사람들이 온 행사'라는 시뮬레이션을 과정 속에서 이미 돌려봤기 때문에 이 자체, 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행복하다. 이미 사람이 몇 명 오든 오지 못하든 나는 이미 이 행사를 했다는 것에 내 행동에 내 행위에 인정한다. 



앤드류 스캇 연극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표가 매진인데 되도록 내일 표를 찾아보고 보는 걸로!--내일 말고는 딱히 시간이 없다.) 담당자님이 고급 호텔 카페에서 영국 배우를 본 경험을 나눴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내일은 좀 멋진 호텔 카페 라운지에서 작업하려고 한다. 오늘 집이 아닌 집 근처 펍에 나와 작업을 했을 뿐인데 삶의 질이 올라가고 동시에 영국에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사실 영국에 여행 온 거 맞음) 남은 날들은 미팅 전중후에 내가 좋아하는 박물관의 카페, 좋아하는 서점에 있는 카페에 있기로 스케줄에 넣을 예정이다.


내일은 우선 V&A Museum으로 출동!



엑셀과 숫자를 사랑하는 소설가로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살았습니다.

코로나로 4년정도 국제여행을 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 보러 여행 왔다가

책을 내고 

외국에서 책 이벤트까지 하게 된 여정을 담았습니다.


워낙 매일 영화같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일상이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무지 기대됩니다.


총 6주 동안 여행하고 있고

오늘은 37일째입니다.

남은 5일 동안

매일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올라오지 않으면 독촉 부탁합니다)
 

정제되지 않은, 여행지에서 바로 전하는 진행형 글입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생생한 스토리를 사진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hyunju_writer


해외에서 이벤트를 준비하는 책이 궁금하다면: 

The Words Factory (영문 버전) 혹은 글공장(한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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