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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적지 빅토리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by 현쥴리

꽤나 많은 곳을 가 본 경험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가장 좋았던 때, 굳이 짐을 싸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김치가 없는 곳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지금과는 상당히 많이 다른 나였다. 이런 바보 멍청이.) 캐나다 또한 이미 다녀온 곳 중 하나였고 역시나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없다. 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 리스트 중에 캐나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도시 선정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비행기표를 위해서 우선 목적지를 빠른 시일 내에 결정했어야 해 했고 어렸을 적 여행들처럼 억지로 그리고 의미 없이 다녀오고 싶지 않았다.


빅토리아 거리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녔던 지하철이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미션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환승이 필요하지 않은 지점에서의 반복되는 하차와 승차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나의 주머니 안에 준비되어 있는 비상약. 무사 졸업을 위해서는 학점 챙기기보다는 무사히 지하철 타기가 더 우선 이었다. 평온함이 필요했다. 적당한 높이의 건물들과 교통수단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적당한 마을을 원했다. ‘토론토, 밴쿠버’ 캐나다를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도시다. (미국-뉴욕, 호주-시드니, 스위스-취리히 이런 느낌인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대도시는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L1055805.JPG BC주 의사당

많은 시간을 투자한 조사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빅토리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캐나다의 작은 영국. (이름부터 영국이다.) 그리고 작은 아일랜드,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 (가자마자 벌벌 떨었다.), 서양인들이 은퇴 후 자리 잡는 곳. 캐나다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표현하는 말 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큰 고민에 비해 생각보다 단순하게 나의 도착지가 정해져 버렸다. (비행기표를 두 번 바꿨다.)


빅토리아에 땅을 내딛던 날의 날씨는 굉장히 화창하고 맑았다. 신기하게도 불치병이라 생각했던 비염이 바로 사라져 버렸다. (사실 한국만 벗어나면 늘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맑고 깨끗했다. 아주 고요하지는 않았지만 참을만한 적당한 소음이 존재했다. (알고 보니 호스텔 위치가 홈리스가 제일 많은 거리라고 한다.) 그저 모든 것이 적당했다. 어렸을 적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던 ‘캐나다’라는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내가 정말 원했던, 적당한 높이의 건물들과 그 어느 곳이든 걸어 다니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대략 2주 정도 빅토리아에 머물렀다.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거리를 걸어 다녔다. (지하철역은 전혀 보지 못했다. 지하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속을 썩이던 허리가 가끔 또다시 말썽을 부렸다. 덕분에 허리 핑계를 대고 수상 택시를 타보기도 했다.

ADA6ACFA-8BF3-4DC6-90CE-1D0BC1809768.JPG 관광객만 탄다는 수상택시
L1055864.JPG 빅토리아 항구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캐나다로 향했다. 우선 한국을 벗어났으니 시간을 가지고 여유를 갖자고 마음을 먹었다.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이제 막 도착했던 나는 관광객 마인드가 더 컸다. 일주일 동안은 꾸준히 밖으로 나갔다. 시차 적응에 젬병인 나는 졸린 눈을 억지로 부릅뜨며 부지런히 관광을 다녔다. 빅토리아에는 생각보다 한국인이 많았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심심치 않게 한국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 특정 거리에는 유난히 한식당이 많았다. (노래방, 치킨집 없는 것이 없었다.) ’ 빅토리아 한인타운’이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한인타운이라고 하기에 딱 알맞았다. (반년 동안 캐나다에 있으면서 한국인이 제일 많다고 느껴졌던 곳은 밴쿠버가 아닌 빅토리아였다.) 나름 혼자서 보물을 찾은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인이 많았다.

L1055846.JPG 캐나다에서 유명한 페어몬트 호텔이 있는 빅토리아 항구


외국으로 나갈 때면 한국인들이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다. 한국을 떠난 만큼 한국인이 아닌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그런 느낌이다. 특히 일주일 동안 식빵 한 줄로 연명하다 한인 마트에서 햇반 4개를 사 왔을 때의 기분은 어찌 표현할 수 없다. 이래나 저래나 나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햇반 구매와 별개로 나는 대체적으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한국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좋은 경험보다는 좋지 않은 경험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돈을 떼인 건 내가 가지고 있는 반감보다는 조금 덜 하겠지만 마음을 다 터 놓기에는 위험요소가 더 많았다. (빅토리아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다.)


빅토리아는 봄과 여름이 가장 예쁘다고 한다. (가을도 예뻤다. 비가 오는 날이 많았지만.) 큰 항구가 있는 덕분에 물도 볼 수 있고, 꽃을 실컷 볼 수 있는 아주 큰 유명한 부차드 가든도 있다. 왜 이곳이 캐나다의 영국으로 불리는지, 왜 많은 서양인들이 은퇴 후 이곳으로 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운타운을 정복하기에 일주일은 충분했다. (덕분에 아주 많이 심심했다.) 늘 나에게 찾아왔던 두통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직 앞으로 지낼 집도, 돈을 벌 직장도 찾지 못했지만 1년 동안 머물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살기 위해서 집과 일을 얼른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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