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세계 각국에서 배낭여행 혹은 워홀을 위해 온 친구들로 호스텔은 늘 북적이었다. 시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나는 늘 방 안에 뻗어 있었다. 그나마 하루 정신이 잠깐 들었을 때 호스텔 바에서 사람들과 맥주 두 잔을 마셨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그 외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다. 평소 고독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이때는 고독보다는 외로움이 더 컸다. 사소한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 그리고 친구와 페이스톡을 할 때면 조금은 괜찮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외로움이 배가 되어버렸다.
나는 호스텔에서 벙커 베드로 꽉 채워진 방이 아닌 침대가 하나 있는 독방을 썼다. (화장실은 공유) 짐이 많고 잠자리가 예민한 편이라 돈을 조금 더 주고서라도 혼자 쓰고 싶었다. 개인 공간이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캐리어 하나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여유 공간은 없었고 방음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주일이 되어가자 진절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남아있는 예약 기간을 취소하고 다운타운에서 가까운 주택을 에어비엔비를 통해서 예약했다. (호스텔과 가격이 같았다.)
내가 예약한 방에는 널찍한 킹 사이즈 침대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납할 수 있는 큰 서랍장과 사무 용무를 볼 수 있는 책상도 하나 있었다. 주택가라서 그런지 주변은 고요했다. 눈치 게임할 필요 없이 편하게 샤워할 수 있었고 깨끗한 주방에서 조리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숙소를 옮기고 나서 생활의 질이 나아졌다. 그 반대로 외로움은 더욱더 커졌다. 사람을 마주할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살다 온 지인은 있어도 캐나다에 살고 있는 지인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폰으로 이것저것 하다가 오래간만에 보이는 이름을 발견했다. 학교 다닐 때 유학생들과 그룹을 만들어 한 학기 동안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다른 한국인 친구 두 명과 함께 캐나다에서 온 ‘사라’라는 친구와 한 그룹으로 배정받았다. 참가자들 자유로 진행이 되었던 탓에 흐지부지 되어 버리는 팀이 많았지만 우리는 매주 만나려고 노력했다. (정말 신나게 놀았다.) 학기가 끝이 나자 프로그램은 종료가 되었고 사라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 후, 간간히 연락을 하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소식이 뜸해졌다.
‘사라, 잘 지내? 나 지금 캐나다야!
SNS를 즐겨하지 않는 친구라서 메시지를 읽기는 할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보냈고 이틀 후에야 답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래간만이야 줄리! 나는 빅토리아라는 곳에서 살아! 지금 어디에 있어?’
‘사라! 나 빅토리아 야!!!’
우리는 바로 약속을 잡았다. 먹고 싶은 음식이나 하고 싶은 것이 있냐는 사라의 질문에 그냥 캐나다 자체를 느낄 수 있으면 무엇이든 좋다고 했다. 사라가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서촌에 위치한 칼국수로 유명한 집에 데려가 칼국수와 감자전을 시켜 먹었었다. 이번에는 사라가 나를 빅토리아 항구 바로 앞에 위치한 캐네디언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생각보다 가격이 꽤나 나가는 메뉴판에 나의 동공은 흔들렸지만 그나마 저렴한 피시 앤 칩스를 고를 수 있었다. (좋아하기도 하고) 지출만 계속되는 상황이라서 돈을 아껴야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사라가 내 음식 값까지 계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메뉴판 뒷장을 좀 더 볼걸)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리 챙겨 온 미니 우산을 가방에서 꺼내어 펼쳤다.
‘사라, 나 여기 있는 동안 캐나다인이 되고 싶어’
‘그래? 그럼 그 우산부터 접어’
한국에서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우산도 없이 나타난 그녀를 보고 우리는 놀랬다.
‘사라, 여기 한국이야. 제발 우산 써!’ 우산을 씌어줘도 괜찮다며 거절했었다.
‘줄리, 지금 너만 우산 쓰고 있어.’
빗방울이 한 두 방울만 떨어져도 바로 꺼내던 나는 사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산을 바로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우리는 다운타운에서 아주 가까운 ‘비콘 힐’이라는 공원으로 향했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산책길이 있었고 바다를 보며 걸었다. 날씨가 우중충한 탓에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과 마주한 바다는 속을 뻥 뚫리게 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빅토리아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사라는 가끔 이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한다고 한다. 공원에 들어서자 공작새가 떼거지로 있었다. 여기저기 청설모들이 뛰어다녔고 정체모를 동물들이 간간히 있었다. 자유롭게 다니는 동물들이 참 보기 좋았지만 동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내가 지나갈 때는 그들이 잠시 자유로움을 억제하길 바랬다.
비콘 힐 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토템폴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사라는 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녀보지만 여기저기 공사 중인 공원은 곳곳의 길을 통제했고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중간중간 다른 토템폴들을 마주할 때마다 사라는 ‘이건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누가 봐도 낮았다.) (나도 누군가 남산에 데려가 달라고 하면 한 번에 길을 찾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비도 오는 탓에 신발이 진흙에 얼룩덜룩해졌고 구글 지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나는 굳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토템폴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저 공원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레스토랑에서 공원까지 그리고 공원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보니 이미 만보를 훌쩍 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지쳐버린 우리는 날이 좋을 때 더 좋은 곳을 가자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내고 있는 집의 주소를 물어본 사라에게 에어비엔비 주소가 적혀 있는 열쇠고리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놀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웃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에어비엔비 집과 사라의 집은 두 블록 차이였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있었던 것이었다.
캐나다 동부 끝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사라는 학교를 졸업하고 빅토리아로 이사를 했고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집 동네에 숙소를 잡았던 것이었다. 세상 참 좁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공원에서 집까지 또 한참을 걸어갔고 사라의 집과 나의 숙소 중간 그 어딘가에서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캐나다에 온 지 근 일주일 만에 제일 많이 말을 했던 날이었다. 사라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