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Aug 13. 2016

<걸어도 걸어도> 가족이라는 지독한 병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걸어도 걸어도’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 <태풍이 지나가고>(201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는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가족을 이야기한다. 료타는 부모가 죽은 뒤에야 3년 전 어머니의 속내가 드러났던 ‘그날’을 떠올린다. 


준페이의 기일이면 온 가족이 집으로 모여든다.  ⓒ<걸어도 걸어도> 스틸.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첫째 아들 준페이가 죽었다. 바다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기일이면 온 가족이 부모의 집으로 모여든다. 여동생, 그녀의 남편과 두 아이들이 찾아오면 허전했던 마루는 금세 복작거린다. 뒤늦게 또 다른 아들 료타가 아내와 아츠시의 손을 잡고서 집안으로 들어선다. 


  가족들은 함께 요리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옛 추억을 꺼낸다. 평화롭고 소소하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모두의 마음엔 바짝 날이 서있고, 매 순간 서로를 상처 입힌다. 아버지는 무심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손주들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또한 준페이처럼 의사가 되지 못한 료타가 한심하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이 사별한 여자와 결혼한 것도, 전남편의 아들과 함께 사는 것도 마땅치 않다. 아츠시의 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료타는 아츠시의 새아버지가 됐다. 료타가 이룬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난 가정이다. (그러나 ‘피가 섞인 자식’을 낳고 싶은 료타의 마음은 ‘혈연’을 향한 욕망과 관성을 보여준다.


료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난 가정을 이뤘다. ⓒ<걸어도 걸어도> 스틸.



  혈연이란 얼마나 지독하고 무서운 관계인가. 료타는 늙은 부모가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망가진 지지대와 타일을 고쳐주지 않는다. 형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신이 현재 무직 상태인 것을 숨기기도 한다. 딸은 오로지 ‘자기 식구’의 잇속만 챙긴다. 그녀에게 부모와 형제는 챙겨야 할 식구가 아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내연녀에게 세레나데로 불러줬던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흥얼거리며 자식들에게 과거를 폭로한다. 가족이라서 염려하고 걱정하며 강요하고 간섭한다. 너무나 가깝기에 때로는 서로를 멀리하고 기만한다.


  고요한 전쟁통에 준페이가 구해낸 아이, 요시오가 문을 두드린다. 그는 스모선수를 닮은 외모에, 구직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사내다.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성품까지 올곧았던 준페이가 목숨을 바쳐가며 구한 아이는 ‘별 볼 일 없는’ 어른으로 자랐다. 가족들은 요시오를 보며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준페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부모에게 요시오는 준페이를 죽인 죄인이나 다름없다. 매년 그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 유가족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게 하는 것, 죽은 이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내리는 잔인한 형벌이다.



 어머니가 요시오를 초대하는 이유를 털어놓던 밤. ⓒ<걸어도 걸어도> 스틸.


   

  감독의 최신작 <태풍이 지나가고>(2016)는 <걸어도 걸어도>의 연장선 상에 위치해 있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 이름이 ‘료타’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멸과 탄생, 상실과 만남을 반복하며 걷고 또 걷는 ‘삶’을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그려낸다. 삶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순환과 반복이다. 사랑해서 가족이 되고 가족이기에 사랑한다.



부전자전.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


  료타(<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 헷갈림 주의)는 흥신소 고객에게서 갈취한 돈을 경마장에서 탕진하는 철없는 가장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과 꼭 닮았다. 어릴 때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어른이 된 것이다. 료타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결국 이혼과 동시에 가장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가 어영부영하는 사이 아내에겐 애인이 생겼고, 아들은 그를 새아버지로 맞는다. 그럼에도 료타의 아들 싱고 역시 료타를 닮았다. 홈런보다는 볼넷을, 야망보다는 공무원을 꿈꾼다. 좋든 싫든 가족은 가족을 닮고야 만다. 숨을 쉬는 한 몸에 피가 돌 듯, 살아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피의 굴레를 씌우고 자식은 부모에게 족쇄를 채운다. 료타와 그의 누나는 늙은 어머니를 연금 자판기쯤으로 여긴다. 평소엔 생사 확인에도 소홀하지만 돈이 궁해질 때쯤 어머니에게 찾아가 손주의 학원비를 대주십사 부탁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과 자식의 자식을 사랑한 죄로 기꺼이 이용당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라는 병을 앓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걷고 또 걷는다.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


  죽음, 이별, 소원 등 여러 이유로 일어나는 가족의 해체는 병세를 더욱 깊어지게 한다. 삶을 어지럽히는 태풍과도 같다. 반드시 닥쳐올 것을 알지만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애증으로 묶인 관계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오는 충격은 일상을 뒤흔든다. 그러나 가족의 상실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가족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부가 될 순 없다.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떠밀려간 뒤엔 더없이 맑은 하늘이 찾아온다. 부모는 자식을 두고 떠나며, 남겨진 이들은 빈자리를 채워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렇게 우리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를 걷고 또 걷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