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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Nov 10. 2016

<자백>은 좋은 영화인가

잘 만든 영화와 만들길 잘한 영화

영화 <자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감안하더라도, <자백>의 연출은 투박하고 편집은 거칠다. '미스터리 액션 추적극'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역동적이거나 박진감 넘치지는 않는다.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따지자면 많은 구멍들이 눈에 밟히는, 말 그대로 서툰 영화다. 그러나 동시에 유의미한, 봐야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저하는 손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손. 지워지는 증언. ⓒ<자백> 포스터.



  최승호 PD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유우성 사건' 담당 검사 등을 취재하며 진실을 구하는 자을 화면에 담는 데 주력한다. 스스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에게 '사과하라' 요구하고, 때로는 늙은 정치인을 조롱한다. 관객은 그와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분노하면 된다.


  최 PD의 강한 자의식, 정보 접근성의 차이는 관객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앞서 이상호 기자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치명적 단점이다. 자신의 정의감을 노출, 강조하다 보면 의제가 흐려지는 부작용이 생긴다.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바람직한 언론인'이지만 평범하고 친근한, 몰입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엔 부족하다.


"어, 나는 아버지 친구인데..." ⓒ<자백> 스틸.


  최 PD의 저널리즘은 때때로 잔인하다. 예컨대 한 탈북자가 검찰 조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최 PD는 이를 취재하다가 고인의 어린 딸이 중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구'였다며 "돌아가셨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수년 전 통화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버지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낯선 이의 입에서 전해진다.


  비어져 나오는 아이의 목소리가 홀로 우두커니 앉은 최 PD의 모습 위로 흐른다. 당혹스럽다, 의심이 든다, 밀려드는 슬픔을 막을 수 없다. 아이의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 극적인 장면, 소위 좋은 그림이 연출되었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괴물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괴물로 변하는 일이 용납될 수 없듯,  그는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다.

 

총기를 잃은 그의 눈이 서늘한 빛을 냈던 순간. ⓒ<자백> 스틸.


  김승효 씨의 증언 장면은 <자백>이 'PD수첩'이 아닌 영화로서 지향해야 할 바를 시사한다(김승효 씨는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로, 모진 고문을 당하다 병을 얻어 십수 년간 정신병원에서 생활했다). 

  "한국이 얼마나 나쁜 나라인지 말하고 싶다. 한국인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는 최 PD, 나아가 자신을 담는 영화 자체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나쁜 나라를 알리는 사람이 덩달아 나빠지지 않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한다.


  해당 장면에서 최 PD는 프레임 밖(관객과 같은 위치)에 앉아 취재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김승효 씨와 동료들은 서서히 굳게 닫힌 마음의 벽을 허문다. 그리고 기꺼이 두렵고도 아픈 상처를 꺼내 보인다. 바라보는 이들의 눈엔 눈물이 차오르고, 부당함을 향한 분노 또한 타오른다. 핵심은 '바라보는 권력'의 주체를 PD가 아닌 관객으로 두는 것이다.


찍지마. 알려고 하지마. ⓒ<자백> 스틸.


  모든 것은 관객, 나아가 국민의 몫이다. 이는 영화가 다루는 소재뿐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건 또는 영화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안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날조와 진실, 졸작과 명작 사이에서 각자의 의견을 세울 수 있다. 요컨대 '영화가 알리려는 사건을 알 권리'와 '영화가 관객에게 알려질 권리'가 모두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국내 주요 멀티플렉스의 상영 거부는 부당한 처사였다).


  최승호 '감독'이 되어야만 했던 배경을 인지하는 게 그가 추적하는 진실만큼 중요하다. 그는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대신 서툰 만듦새를 감수하고서 영화를 제작했다. 언론인이자 PD로서 '방송'할 사건을 감독으로서 '상영'하길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론 보도에 많은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필요한, 정말 중요한 뉴스를 보도하는 게 공영방송의 역할이다. 지금 공영방송은 언론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상태가 됐다. 공영방송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자백>을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진실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달린다. ⓒ<자백> 스틸.


  <자백>은 '잘 만든' 영화가 될 수 없지만 분명히 '만들길 잘한' 영화다. 존재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은폐된 진실, 권력자의 부정, 사회의 부조리, 언론의 편협함… 최승호가 예술의 영역에서 목소리를 냄으로써 이미 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자백>은 본연의 목적을 이뤄냈다. 감았던 눈을 뜨게 하고 막았던 귀를 열게 한다.


  '사람'이 없는 나라. <자백>은 내가 발 딛고 선 땅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40년 전의 악몽이 오늘날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엔딩 크레딧에 열거되는 거짓 자백의 희생자들을 보면 숨이 턱 막혀온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진실을, 정의를 좇고 있다. 또한 그러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 이것이 예술의 정치화가 갖는 효력이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의 힘이다. 집단과 권력의 존속을 위해 인간을 지워내는 이곳의 비극 속에서도, 여전히 이상을 꿈꾸도록 한다. 그렇기에 믿고 싶다. <자백>과 같은 시도가 유효함을.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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