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Dec 01. 2016

<원령공주> 절대자는 없다

전지전능의 신화를 대신하여

영화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화와 일본의 역사를 결합한 <모노노케 히메>(1997)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공존을 그린다. 영화는 캐릭터의 선악을 모호하게 남겨둔다. 절대선 또는 절대악이 없다. 신도 예외는 아니다(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선 늘 절대적 존재가 부재한다. 가오나시, 하쿠, 하울, 포르코 등등 언제나 모순적이고 선악 구분이 어렵다).


  어느 밤,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어둠을 가로지르며 매섭게 달려든다. 온몸에 거머리 같은 것을 잔뜩 뒤집어쓰고 붉은 안광을 뿜는 모습이 끔찍하다. 그는 원한을 품고 악령이 되어버린 나고신. 과거 숲을 수호했던 그는 나무를 쓰러뜨리고 풀을 말라죽게 하는 것도 모자라 무고한 에미시족을 공격한다. 신은 왜 인간을 증오하는가. 에미시족의 용맹스러운 청년 아시타카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세상의 서쪽으로 향한다.



  척박하고 빈곤한 마을을 지나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다다른 곳은 타타라. 수장 에보시의 지휘 아래 제철산업으로 번영을 이룬 곳이다. 그녀는 나고신을 재앙신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학살자지만 마을 사람들의 은인이다. 훌륭한 지도자로서 나병환자들을 보살피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며 시장에 팔려 나온 여자들을 데려와 새 삶을 선물한다.


  자연 세계에도 지도자가 있다. 들개들의 우두머리인 모로신은 거대한 몸집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숲을 지킨다. 모로는 인간이 버려두고 간 작은 여자아이를 양딸로 삼고서 들개로 키워냈다. 그게 바로 산(원령공주). 신성한 수호자인 모로와 산 역시 인간에겐 '괴물'과 '귀신 들린 아이'에 불과하다.


생명 그 자체, 시시신. ⓒ<모노노케  히메> 스틸.


  그리고 또 하나의 존재, 시시신. 성별도 표정도 알 수 없는 그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말 그대로의 신이다. 시시신은 삶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앗아가기도 한다. 사슴의 형상을 한 그가 땅에 발을 디디면 그 자리엔 꽃이 무성히 피어나고, 발을 떼는 순간 시들어버린다. 그는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그를 섬겨야 하나, 없애야 하나.


  신의 능력 앞에서 저항 또는 쟁취하려는 자와 복종하는 자가 충돌한다. 에보시는 시시신을 죽이면 다른 신들을 보통 짐승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피로 아픈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탐욕스러운 왕은 영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시신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한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동물은 시시신이 자연을 도울 것이라 믿으며 그와 숲을 지킨다.


잔혹한 전쟁, 처참한 희생. ⓒ<모노노케  히메> 스틸.


  정작 시시신의 태도는 불분명하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인간이나 우러러보는 자연이나 그에겐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고신을 구하지 않지만 아시타카를 살려준다. 그렇다고 모두를 돌보는 것도 아니다. 인간 세상이 전쟁, 사고, 질병, 기아 등 온갖 재앙으로 가득 차도록 '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 힘도 절대적이지 않다. 시시신은 인간이 쏜 포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해 머리를 잃는다. 심지어 머리를 찾으려 버둥거리다 숲의 모든 생명체에게 해를 가하고 만다.


  시시신은 결국 사라진다. 그는 '생명' 그 자체로서 삶과 죽음을 능력으로 사용했지만, 생명이었기에 필연적 소멸을 피할 수 없었다. 인과와 상관없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모로와 옷코토누시(멧돼지 우두머리)는 목숨을, 에보시는 오른팔을 잃었다. 무기를 제조하던 나병 환자들은 쾌차했다. 전쟁을 벌인 왕은 영영 유혈이 낭자한 참상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의 명을 받들던 지코 역시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다.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모노노케  히메> 스틸.


  신은 죽었다. 오늘날의 동물들이 옷코토누시가 우려했던 대로, '작아지고 바보가 되어 인간의 사냥감으로 전락'한 것만 봐도 신은 죽고 없다. 부와 행복은 편재하고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죽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임의적이다. 선이 반드시 상을 받거나 악이 무조건 벌 받는 일은 없다. 시시신이 있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신이 절대자가 아니므로 죽어도 죽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하나뿐인 절대자는 없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한 우리가 있다. 사람, 동물, 자연, 모든 생명체, 전부. 시기만 다르지 모두가 삶과 죽음을 겪는다. 같은 처지에 놓인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영화는 상벌을 내릴, 죄를 사할, 구원해줄, 허상을 올려다보는 대신 당장의 이 세상을 바라보라 말한다. 너무도 희미한 선악의 경계에서 어떠한 삶과 죽음을 맞을 것인가. 고민과 선택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셰임> 나의 치부는 그곳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