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헛되지 않게 하는 한줄기 빛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시스템의 틈바구니에 끼어 소외된 사람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현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박수받는 이유는 단순히 무엇을 말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작품의 참된 의미는 주제를 뛰어넘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있다.
국내, 할리우드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영화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 남성중심적 시선의 권력 아래에서 여성은 객체, 비체로서 존재하기 십상이다. 장르 불문 카메라는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하고, 좀 심심하다 싶으면 노출 장면을 삽입하는 식이다. 이는 정의, 평등, 여성 인권을 그리는 영화까지도 쉽게 저지르는 과오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다니엘(데이브 존스)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가 객체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위기에 처한 소녀는 키다리 아저씨와 사랑에 빠지곤 하니까(다니엘과 케이티가 키스라도 할까 두려웠다). 다행히도 둘 사이에서는 어떤 성적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침내 꼭 끌어안아 서로 몸을 포갠 두 사람의 모습은 포근하기만 하다. 다니엘과 케이티는 남자 대 여자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교감하고 유대한다.
케이티가 다니엘에게 도움을 받는다며 젠더적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조심스럽게 반론하자면 두 사람은 호혜적 관계다. 동정에서 비롯된 선의보다는 연대에 가깝다. 다니엘은 목수의 재능을 살려 케이티의 집을 수리하고, 케이티는 그에게 맛있는 저녁을 제공한다. 케이티는 다니엘을 법률전문가에게 인도하고, 다니엘은 바쁜 케이티 대신 아이들을 돌본다. 다니엘이 만든 책장과 가구를 팔아 마련한 돈은 기부가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위해나갈 사회 속 삶을 위한 환원이다.
감독은 버거운 현실의 순간을 멀리서 바라볼 뿐, 함부로 다가가거나 비참한 상태를 지속시키지 않는다. 예컨대 '케이티가 벼랑 끝에 내몰렸다'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허겁지겁 통조림을 뜯어먹자, 주변 사람들은 얼른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입가를 정리할 수 있도록 휴지를 건넨다. 소위 감성팔이를 위해서는 그녀의 게걸스러운 입모양을 클로즈업하고, 음식물이 잔뜩 묻은 얼굴로 눈물을 자아냈을 테지만.
케이티가 생리대를 훔치다 발각된 날에도 끝내 매춘을 하게 됐을 때에도 그녀를 향한 영화의 시선은 담백하고 서늘하다. 섣불리 감정을 입히지 않는 담백함, 성적 이미지를 덧씌우지 않는 기분 좋은 서늘함이다. 생리대는 여성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구호물품엔 없다(실제로 얼마 전 국내 재난 지원 품목에서 빠질 뻔했다). 생활고로 끼니를 굶는 와중 돈을 내고 사기엔 사치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을 돌보는 동시에 생계를 이어야 하는 그녀를 사회는 외면했고, 그녀 앞에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몸을 파는 일'. 다행히 그녀의 옷가지가 풀어헤쳐지고 낯선 남자와 불쾌한 섹스를 치르는 장면 따윈 없다. 감독은 현실의 케이티들을 가학하지 않는다. 그저 지독히 현실적인 사건의 존재를 인지시킴으로써 커다란 경각심을 불러온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다니엘은 환자이자 노인이지만 극 중 누구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그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굽혀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에게 '자존심'이 곧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미라고 답한다. 종속된 가축이 아니라 사람. 그만큼 영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고자 노력한다.
다니엘이 필요로 하는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마땅한 권리이다. 또한 그는 인간, 사람이자 체제 내에서 주체적으로 행위하는 시민이다. 그의 질병과 무지는 누군가에게 미안해야 할 잘못이 아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안전망은 사회 시스템의 몫이기에 다니엘은 당당하고 유쾌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동정 대신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다. 영화는 그렇게 다니엘을 지켜내면서도 동시에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감독은 다니엘이 죽음을 맞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전후 상황을 토대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거울 앞에서 유독 떨려하던 그, 달려온 사람들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쓰러진 몸. 그 사이 관객이 보지 못한 어느 순간 다니엘에게 죽음이 닥쳐왔을 것이다. 그의 아픔이 구경거리가 되는 일이나 보는 이들이 타의에 의해 죽음을 방관하며 고통스러울 일은 없다.
간결한 러닝타임과 편집 방식 역시 관객, 즉 사람을 존중하는 것 같다고 하면 비약일까.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중간중간의 암전은 관객이 꾸벅꾸벅 졸면서 다니엘을 지켜보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아무리 자다 깨도 그는 컴퓨터 앞에서 헤매고 있다). 문제 제기에 앞서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전하면서도, 고단한 현실 속 우리의 삶까지 더 피로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부패한 권력과 불합리한 체계에 대한 저항과 전복적 메시지는 늘 있다. 특히 최근에 <베테랑>, <내부자들>, <마스터> 류의 영화가 쏟아지고 있는데, 이는 특정 인물의 비현실적인 능력, '해결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큰 한계를 갖는다.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몹시 정의로우며 추리능력과 무술 실력까지 뛰어난 경찰 또는 검사, 때로는 범죄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통쾌하지만 '대리'만족에 기인한 것뿐이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찾자면 뜬구름 잡기가 따로 없다.
이에 반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신의 은총, 초인의 등장, 기적, 판타지 따위의 헛된 희망을 걷어내고 현실에서의 가장 밝은 미래를 말한다. 바로 지금,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변화다. 시민으로서의 삶 말이다. 영화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까맣게 잊어왔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꺼내어 잘 닦은 뒤 윤이 나게 한다.
많은 영화들이 주제와 그를 표현하는 재현의 방식 사이의 괴리로 본래 의도에 닿지 못하곤 한다. 정의 구현을 앞세우면서 범죄를 미화하는 서사, 성범죄를 고발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위아래로 훑어대는 카메라 등 아픈 가슴을 어루만진다고는 하지만 막상 손바닥엔 사포가 붙어있는 꼴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장점은 이제까지의 영화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복한 미래를 확신하지도 문제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영화의 재현 방식과 주제의식이 맥을 같이 한다. 때문에 영화는 춥고 쌀쌀한 배경에서도 온기가 새어 나오며 슬픈 결말임에도 희망적이다.
이제까지와 같은 이야기라해도 '다르게' 전하는 것은 앞서의 결과와는 다른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평범한 이웃 다니엘이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힌 영웅이었듯, 이 소박한 영화는 앞으로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에 한줄기 빛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