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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Feb 28. 2017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산 자를 위한 진혼곡

기억하는 존재를 기리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이 겹쳐 보이고 과거의 일들이 눈앞에서 재현되는 순간을 '기억한다'고 부른다. 현재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일상을 흔드는 기억. 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피동적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고 바래다 사라지는 것을 잡을 수 없으니 얼마나 무력한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텅 비어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기억을 짊어진 삶을 이야기한다. 리 챈들러는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며 주민들의 모욕적인 언행을 견디고 온갖 잡일을 수행한다. 게다가 말썽을 일으켜 몸을 다치게 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을 밀쳐내며 즐거움을 극렬히 거부한다.

  리는 죽음을 택하지 않지만 인생을 포기한다. 삶을 온전히 영위하는 스스로를 참을 수 없다. 죽음마저 사치인 듯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들여다보이는 그의 내면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유령처럼 희미하고 위태롭다. 



리의 고통스러운 과거, 랜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그의 과거가 현재로 흘러들어올 때야 비로소, 그에게 닿을 수 있는 찰나를 얻는다. 요란하지 않게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플래시백. 리의 의식과 무의식이 펼쳐지는 방식은 실제 우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로써 감독은 영화를 '보는' 대신 기억의 경험을 '느끼게' 한다.

  리의 뇌는 뿌연 연기와 타는 냄새를 감지하고선 사랑하는 두 아이가 그의 눈앞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뱉도록 한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자 리의 조카, 패트릭 역시 삶의 고문을 겪는다. 냉동실의 식재료를 보며 차갑게 얼어버린 아버지의 몸을 떠올린다. 지독히도 잔인하지만 그래서 현실적이다. 



바닷가에서 조를 떠올리는 두 사람.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인물들의 회상은 느끼는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다. 쓰디쓴 술을 맛보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다가, 바다 내음을 맡고서, 지나온 일들과 마주한다. 익숙한 상황이지 않은가. 쇼트 하나하나가 경험적인 동시에 감각적이며 핍진하다. 그렇기에 극과 그를 바라보는 무심하고도 아픈 시선은 영화만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사는 동안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 상실과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삶의 대가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어떤 겪음을 피할 수 없고 그럴수록 상흔은 늘어만 간다. 달리 말하면 삶을 '택한' 이들의 몫이다. 두려움을 알면서도 죽지 않기로, 더 겪고 견디기를 결심한 모두는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한 셈이다.



삶을 택한 리와 패트릭의 얼굴.ⓒ<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역시 그런 삶의 어두운 면모를 능동적으로 드러낸 결과다. 과거를 끌어안고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인다. 잊고 싶은 어둠을 상기시킨다. 꿈과 희망을 심지 않은 그 자체로도 찬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삶은 다양하다. 그저 하루를 버티는 게 목표가 되기도 하고 흘러가듯 살다 보면 살아지기도 한다. 행복, 쾌락, 기쁨이 삶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다. 또, 그것들을 이유이자 목적으로 설정하지 않더라도 틀린 삶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모두 무가치한 것은 아니듯이.

  망각도 각인도 뜻대로 이룰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에 당한다' 말하는 대신)'을 한다'라고 표현하며 의지를 갖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참하고 초라한 얼굴을 하고서라도 살아내는 것 또한 삶이기에, 우리는 기억 한다.



비참하고 초라한 얼굴을 하고서라도 살아낸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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