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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03. 2017

<토니 에드만> 괴물로 사는 현재를 고찰하다

뭘 해도 바뀌지 않는 이유

영화 <토니 에드만(Toni Erdmann)>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정무역 커피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소비자는 '공정'이라는 이름을 통해 자신이 아프리카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확신하고 기꺼이 더 비싼 값을 지불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농민들은 커피콩을 팔아 버는 수익보다 영토에서 길러 얻는 식량을 더 필요로 한다. 수익은 아주 미미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중간 업자에게 돌아가기 때문. 당장 커피를 끊고 시설 구축을 위한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는 것이 낫다. 물론 발전의 방향이 각종 첨단 기술로 점철된 도시의 삶이라는 것도 선진국이 멋대로 정한 기준이지 정답은 아니다.



커피콩이 이 영화랑 무슨 상관이 있냐 하면... ⓒ<토니 에드만> 포스터.



  현대화(사실상 서구화)가 모두의 목표가 된 이래 앞선 자와 뒤처진 자가 생기고 부, 기술, 군사력 등의 상하관계 형성에 따른 약탈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절대적 평등이란 이룰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모두 다 행복할 순 없단 의미다. 어쩌면 모두가 불행할지도 모르겠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이다. 분명 옳지 않은 일이지만 세상은 이미 '~주의'로 불리는 여러 과정을 거친 끝에 이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사회 문제 중 많은 것들은 인과를 알고 있지만 시대상(현 체계를 유지하는 동안)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차치된다.



68세대 아버지와 신자유주의 딸. ⓒ<토니 에드만> 스틸.


  마렌 아데 감독의 <토니 에드만>(2016)은 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 독일 가정에 투영한다.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루마니아에서 컨설턴트로 일한다. 그녀의 주요 업무는 기업의 최대 이윤을 위해 비용을 최소로 만드는 일. 쉽게 말하면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중개인으로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이다. 그녀는 원활한 비즈니스를 위해 잠을 줄이고 인맥을 쌓고 섹스를 하고 술과 마약을 들이마신다(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페미니즘은 사치라고 느낄 정도).

  이네스의 아버지 빈프리트(페터 시모니슈에크)는 딸의 삶이 불행하다고 믿는다. 낭만과 여유를 지향하는 그는 딸의 일터를 찾아와 장난을 건다. 그러다 타인의 효용가치를 계산하고 값에 따라 철저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네스에게 '네가 인간이냐' 따져 묻는다. 슬프게도 그의 말이 맞다. 그녀가 PT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사에게 듣는 칭찬은 '넌 괴물(또는 짐승)이야'다. 이네스는 괴물처럼 치열히 살아야만 인정받는 시대를 산다.



빈프리트는 무거운 걸음걸이와 고르지 못한 숨결을 가졌다. ⓒ<토니 에드만> 스틸.


  빈프리트는 전후 풍요로운 경제 환경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을 주도했던 68세대에 속한다. 그렇다면 과거 빈프리트의 시대는 행복했을까. 두 개로 분열된 그의 자아는 독일이 동과 서로 나뉘었던 시간을 말해준다. 이혼 후 혼자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빈프리트가 틀니를 끼우거나 가발을 쓰면, 언제 어디서나 유머를 잃지 않는 토니로 변신한다. 달리 말해 그는 자신을 가리는 분장이 있어야만 용기낼 수 있고 그렇게 하면서까지 강박적으로 진지한 상황을 회피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저물어가는 한 시대를 잡을 수 없다. 해골을 본떠 눈과 입을 검게 칠한 빈프리트의 얼굴은 그의 품에 안겨 죽음을 앞둔 개와 닮았다. 그의 틀니는 낡아 깨졌고 가슴에 찬 혈압 측정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장치처럼 위태롭다. 그는 어머니도 개도 사라진 세상에서 흐려지는 자신을 실감하지만 막을 수 없다. 흘러가는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써 유머를 심고 망각을 지연시킬 뿐.



얽혀버린 두 사람.  ⓒ<토니 에드만> 스틸.


  이네스가 아버지의 틀니와 할머니의 모자를 착용하며 미소 짓기를 시도하지만 어색하고 버겁게만 보인다. 그녀는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착잡히 허공을 응시한다. 빈프리트의 요란한 인생수업에도 불구하고 이네스는 동종업계의 더 큰 회사로 이직한다. 그녀는 더 바삐 잔인해질 것이다.


  토니의 장난은 아무런 변화도 이뤄내지 못한다. 여전히 독일은 루마니아의 경제를 쥐고 흔들고, 기업은 노동자를 더욱 손쉽게 쓰고 버리며, 인간은 사람 이전에 경제적 도구로서 평가받는다. 전쟁을 벌인 어머니의 시간이 아들에게 분단을 남겼듯이, 이러한 이네스의 시간은 빈프리트가 남기고 간 것이다.



이네스의 삶은 빈프리트가 선사한 것이다. ⓒ<토니 에드만> 스틸.


  오늘을 사는 건 모두가 떠난 뒤 프레임 속 혼자 남은 이네스다. 비록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고 부모에게 인간이 아닌 것으로 비칠지라도, 이네스는 과거가 지나간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아등바등 살아간다. 영화는 특정 가치가 옳다고 호소하거나 변화를 강권하지 않는다. 그저 눈앞에 나타낸다. 지금의 최선이 어떤 다음을 낳을 것인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


  다시 커피 이야기로 돌아가면, 현 체제 내에선 아무리 커피를 공정하게 마셔도 '공정(公正)'에 다다를 수 없다. 커피의 문화적 맥락이나 생산 구조를 모두 없던 일로 만들 순 없는 게 현실이다. 오늘날은 과거를 살았던 이들이 이미 만들어냈고, 우리는 그 안에 살며 미래의 날들을 만든다. 지금을 평가하고 유산을 짊어진 채 사는 건 다음 시간을 사는 이들의 몫이 될 것이다. 미래엔 우리가 사라질 테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다만 현재를 돌아봤을 때 조금 더 나은 과거이기를 바랄 뿐이다.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토니 에드만>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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