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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15. 2017

<공각기동대> 첨단 기술 이면의 심오한 물음

1995년 작을 돌아보며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1995)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2017)은 개봉 전부터 끊임없이 이슈를 낳았다.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원작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고, 주연 배우들을 백인으로 캐스팅해 화이트 워싱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마침내 공개된 영화는 그간의 시끄러움이 무색할 정도로 시시했다.


  원작 이미지에 부합하는 최적의 배우이자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스칼렛 요한슨은 평면적인 캐릭터와 허술한 서사 앞에 맥을 못 춘다. 선악구도가 분명하고 악당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여느 할리우드식 SF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과감히 최근작을 포기하고, 12년 전 개봉한 <공각기동대>를 불러들인다.


<공각기동대>(1995)는 어떤 이야기인가?




  '공각기동대'의 서사를 다룰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은 1995년 제작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육감적인 여체를 지속적으로 노출하고 대상화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질적인 젠더 불의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최근작 <너의 이름은>도 갖지 못한 문제의식인데 12년 전 사고방식으로는 오죽할까. 각설하고, 영화는 미래형 인간 쿠사나기 소령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철학적 문답을 구성한다.



인간의 모양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공각기동대> 스틸.



  쿠사나기는 금속 두개골 속 뇌 일부를 제외하면 모든 신체기관이 기계로 이뤄졌다. 그녀가 스스로 로봇이 아닌 인간으로 구분 짓게 하는 유일한 기준은 '기억'이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하는 기억과 그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영혼(전자두뇌에서의 개념은 고스트). 그러나 기억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또한 고스트 자체가 실제 자아가 아닌, 누군가 만들어낸 프로그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쿠사나기는 뛰어난 지능과 신체능력을 가진, 기술의 수혜자지만 그 때문에 끊임없이 존재를 경계하고 고민한다. 그녀의 자문은 지극히 철학적이다. 니체의 존재론적 물음인 동시에 라깡이 정의하는 세계와도 관련이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기억과 자아의 관계를 제시했던 <메멘토>,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의 <매트릭스>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한다.


 

유전자의 기록대로 움직이는 인간은 로봇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공각기동대> 스틸.



  ‘가짜 몸에 전자두뇌를 사용한다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과 의식으로 나를 정의한다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지 않나?’


  쿠사나기는 이러한 내적 혼란 속에서 고스트를 해킹하는 범죄자 ‘인형사’와 맞닥뜨리게 된다. 인형사는 외무성이 비밀리에 진행했던 네트워킹 프로젝트에서 발현된 자의적 프로그램. 그는 스스로 하나의 생명체라고 주장하며 쿠사나기가 소속된 9과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 인형사의 행보는 모두 쿠사나기에게 접근하기 위한 계획으로, 그녀에게 자신과의 융합을 제안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진화하는 것, 즉 번식이다.


  여타 영화가 기계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잃지 말기를 강조한다면 <공각기동대>는 변화한 기술에 맞게 진화(또는 퇴화)된 존재를 정의하고 제시한다. 미래의 '인간상'은 네트워크 내에서 경험을 확장하며 기억을 축적하고 융합하는 동시에 도태된 자신의 일부를 삭제, 진화한다.



쿠사나기와 인형사는 서로 동질감과 흥미를 느낀다. ⓒ<공각기동대> 스틸.



  인간의 유전자도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인간은 기억 시스템을 통해 기억하고 그에 의해 개인으로 존재할 뿐. 컴퓨터가 기억을 조작하게 됐을 때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위 대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축약적으로 드러낸다. <공각기동대>는 정보통신 기술 앞에 선 인간 특성의 허점을 꼬집고 자만을 비웃는다. 또한 삶의 양식은 물론 인간이 숭배해왔던, 인간상, 자아, 영혼 등으로 불리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있게 했던 모든 단어들의 의미를 탈취한다.



쿠사나기는 인형사의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고, 인형사는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공각기동대> 스틸.


 

  기억에 집착하며 내가 나이기를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제한하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마침내 인형사와 융합해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다(교미 후 탄생한 존재는 어린 아이의 몸을 가졌다). 그 또는 그녀는 자신이 쿠사나기도 인형사도 아닌 또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며 광활한 네트워크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녀에게 인간의 '나'라는 관념은 효율적인 프레임에 불과하다. 이는 배제와 구별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는 기존의 인간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영역을 확장하며 영속하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존재의 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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