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중년의 여인이 피고인 신분으로 전범 재판에 선다. 이름은 한나 슈미츠. 그녀는 1943년부터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행진'으로 이끌었다. 증인은 한나가 소녀들을 예뻐하며 자신의 곁에서 책을 읽게 시키고는 가스실에 넣을 '선별 인원'으로 뽑아 죽게 했다고 증언한다. 재판장은 술렁이지만 정작 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업무를 행했을 뿐인데요. 그럼 그 상황에서 저는 뭘 했어야 했죠? 누구든 같은 일을 했을 거예요."
거짓으로 제 살길을 찾는 동료들에 비해 모든 사실을 술술 얘기하는 한나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다. 그녀가 고아로 자라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하면 벌 받는 것'이란 개념이 정립되기 전의 아이들은 잔인하고 위험하다. 햄스터를 전자레인지에 넣거나 잠자리의 날개와 다리를 하나씩 떼어보는, 악의 없는 행위의 끔찍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나는 지나치게 순수한 나머지 사회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마이클은 그런 한나를 달리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나이 열다섯에 서른여섯 한나를 만나 마음을 빼앗겼고 이후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 반면 한나는 사랑할 줄도 사랑받을 줄도 모른다. 먼저 낭독하면 그다음에 섹스하기. 그녀에게 연애는 치기 어린 소년에게 그가 원하는 몸을 내어주고 문학적 지식을 얻는 평등한 거래다. 자신이 문맹인 걸 들켜 일방적으로 도움받는 관계로 기운다면 그녀의 자아는 무너져내릴 것이기에, 한나는 흔들림을 감지하자마자 가차 없이 마이클을 떠나버린다. 한나에게 사랑은 읽어낼 수 없는 텍스트(text)다.
한나가 사회적 맥락(context)을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화를 거치지 않았기에 자신의 죄 또한 모른다. 그녀는 단순 감시 업무인 줄 알고 친위대에 자원했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일을 했을 뿐이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용소로 들어오는 인원은 점점 늘어나니 일부를 가스실로 보내야만 했다. 효율성을 위해 노동력을 얻을 수 없는 노인이나 환자, 아이들을 골랐다. 유태인들의 도망을 막는 게 그녀의 일이었으므로 수용소에 화재가 났을 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마침내 글을 배워 마이클이 읽어주던 책을 혼자 힘으로 읽게 됐을 때, 그와 진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 한나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얻는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녀는 꾹꾹 눌러쓴 유서를 통해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피해자 측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문맹교육기관에 전달하겠다는 마이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용서하지 않되, 그녀가 죄인이 된 과정을 돌아보고 배경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저 살인마로 기록된 한나는 마이클에 의해 다시 읽힌다.
한나는 배움의 권리를 누리지 못해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무지하지 않은 자들은 어떠한가.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던 한 법대생의 외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한나의 동료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던 사람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합리성에 매몰된 피해자일지 모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현대사회의 정상성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효율 높은 결과만을 좇는 '합리적 이성'을 강요받으며, 도덕과 윤리를 비합리적 영역으로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면죄의 사유가 될 수는 없지만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구조에서 비롯된 병리적 현상이 개인을 에워싸고 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을 것이다. 책을 읽어주던 소년은 아버지가 되어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나간 역사를 끄집어내 보임으로써 새로이 생각하도록 한다. 개인의 성품, 광기 등으로 치부해 온 과거의 많은 것들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흘려보낸 것들을 주워 담아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영화는 유의미하다. 제목 그대로 이 사회의 독법을 제시하는 'The Reader'로서.